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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Jun 06. 2024

그런 이별을 겪을 줄이야

- B로 시작하는 Bus (버스)

초등학교 1학년, 봄소풍 때였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큰 동그라미를 만들어 앉았다. 반장이었던 호야가 그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서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라는 노래를 불렀다. 지금까지 그 모습이 선명한 걸 보면 그 애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 걔는 대구로 전학 갔다. 그것이 영원한 이별일 줄 그때는 몰랐다.




그런 후, 초등학교 4~5학년 때쯤이었다. 그날 우리는 여느 날처럼 선이네 집에 모였다.

선이 어머니는 중학교 영어 교사였다. 선이 어머니를 대신하여 외조모가 선이네 자매를 키웠다. 또한 먼 친척 언니가 그 집에서 함께 살면서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선이네는 장터 들머리에 있었다. 쾌생의원 바로 앞집이었다. 낡은 대문을 열면 그늘진 흙바닥이 축축했다. 여름에 그 대문 밑을 지나가면 서늘했다. 땅에서부터 냉기가 올라왔다. 주인댁은 대문에서 보아 왼편에 있는 본채였다. 선이네는 마당을 가로질러 가면 있던 아랫채에 살았다.


선이 할머니는 우리를 늘 환대해 주셨다. 우리가 도착하면 먹을 간식을 내놓으셨다. 그러나 선이네 집에 가는 것이 좋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생전 본 적 없는 플라스틱 소꿉놀이 세트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사금파리 몇 개 놓고 소꿉놀이를 했었다. 앙증맞은 소꿉들이 신기할 뿐이었다. 12가지 색깔 크레용을 사용하던 우리와는 달리 선이네 집에는 54가지 휘황찬란한 색깔을 가진 크레파스도 있었다. 그 크레파스로 만화에 색칠을 하며 놀기도 했다.


그날 우리는 선이네에 모여서 청이와 이불을 뒤집어쓰는 놀이를 했다.


"전학을 간다고? 가서 잘 지내라."


선이 할머니가 청이에게 말했다.


천둥벌거숭이였던 우리는 청이가 다음 날 전학을 간다고 해도 평소처럼 즐겁게 놀았다. 아버지가 경찰이었던 청이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댔다. 적어도 그날은 청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놀았다. 우리는 그날따라 청이에게 관대했다. 이별이란 것이 어린 우리에겐 낯설었다. 그렇게 놀던 우리는,

 

"청이야, 우리 이제 못 보는 거야?"


하며 모두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이별을 경험해보지 않아서 그 감정을 어떻게 주체해야 할지 몰랐다.




그다음 날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온 천지가 흉흉했다. 청이가 탔던 버스가 낭떠러지에 떨어진 사고가 났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이런 변고가 있나?"

"그러게, 이렇게 무서운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사노?"

"금평에 사는 박 씨 부부도 탔다네."

"그것뿐인가? 정대에 살던 김주사도 탔다던데?"

"구정리에 사는 정 씨도 탔대."


사람들은 일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구절양장 같았던 조랭이 앞 도로, 지금은 길이 넓게 확장됨 ]

면소재지에는 버스 정류장이 3개 있었다. 천일 여객, 일신 여객, 경전 여객, 등등. 거창으로 가거나 합천으로 갈 사람들은 천일여객이나 경전여객을 이용했다.


대구에 가려면 주로 일신여객을 이용했다. 그날 일신여객 버스는 정원을 초과하여 버스가 터질 정도로 만원이었다. 버스는 면 소재지를 빠져나가 정대 마을 앞을 지나 대구로 갔다. 정대 마을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꼬불꼬불한 구절양장 같았다. 몇 굽이를 돌고 돌면 분기에 이른다. 그 길의 오른쪽은 산이었고 왼쪽은 야성강이 흘렀다. 그 강을 따라가면 조랭이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서 바라보면 낭떠러지가 엄청 가팔랐다. 마치 중국 잔도길 절벽 아래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길이 배나 확장되었다.


버스는 조랭이 마을 앞 낭떠러지에 떨어졌다.

마을마다 곡소리가 처량했다. 각 마을에서 몇 명씩은 그 버스에 탔기 때문이었다.


"옴마야, 전쟁보다 더 무섭데이."

"그렇지. 인공 시절에도 이런 난리는 아니었지."


구정리에 살았던 정씨는 내 친구 원이의 아버지였다. 원이의 아버지도 그 버스에 탔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원이네 집 쪽으로 가기 싫어졌다. 대신에 인적이 드문 방천길로 가곤 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원이네 대문 쪽으로 가면 돌아가셨던 분의 혼이 나를 덮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원이는 아무 흔들림 없이 학교 생활을 잘했다. 그런 원이가 큰 바위 같아 보였다. 원이 어머니는 당시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쌍꺼풀 수술을 하셨다. 그리고 굽 높은 뾰족구두를 신고 다니셨다.


"원래도 돈이 많은 집인데 그럴 수도 있지. 거기다가 보상금까지 나왔다네."

"그래서 쌍꺼풀 수술도 하고 좋은 옷도 사 입는대."

"그렇게라도 해야 살지, 젊은 나이에 어떻게 애들 데리고 살겠어?"


원이네 대문은 늘 닫혀 있었고 원이 어머니의 원피스는 점점 화려해졌다.




위험천만한 그 길을 버스 타고 수없이 드나들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몸서리쳐진다. 그 시절 사람들은 대체로 안전 불감증이었던 것 같다. 그 버스 사고는 늘 맘 속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일신여객은 성안여객으로 회사명이 바뀌어 계속 운행되었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꼬부랑길을 성안여객 버스를 타고 다녔다. 나도 그랬다.


꼬부랑 길을 달리는 버스를 보면
옛 친구 청이가 생각나고
원이네 솟을대문도 떠오른다.



[사진:픽사베이]

글에 등장한 사람 이름과 버스 회사명은 가명입니다.



#버스  #잔도길  #꼬부랑길  #솟을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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