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사고를 당하여 하루아침에 의식 없는, 딴 세상 사람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달려와서 위로해 주었다. 문병 오면서 책을 들고 오신분들이 꽤 있었다. 그중에, <정글에 천국을 짓는 사람>이라는 책이 있었다. 10년 전에 그 책을 읽을 때, 한 장면이 솔깃하게 맘에 끌렸다. 그 책의 내용이나 주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음 장면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희망을 주는 내용이었다. 그 부분을 발췌했다.
'너 두고 봐라. 깨어나기만 하면 가만 안 둔다.'
식물인간이 된 지 9개월이 되어 가지만 아직도 욕심과 자기주장만 살아서 꿈틀거렸다. 어딘가에서 받을 돈이 얼마가 있고 비밀통장에 몰래 숨겨 놓은 돈도 꽤 많은데 이를 어쩌지 하면서 안절부절못했다. 더구나 친구에게 빌려 준 거액의 돈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 받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걱정하고 몸부림쳐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의구심이 곧이어 체념으로 바뀌었다. 으리으리한 집이며 사무실이며 번쩍번쩍한 자동차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세 치 혀조차 마음대로 놀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벌레보다 못한 존재구나. 팔팔하게 살아 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커다랗고 징그러운 벌레가 되고 말았구나. 체념도 곧 절망으로 변했다.
그때 수원에 사시는 장모님이 오셨다.
그날은 그가 좋아하는 고구마순 김치를 담가 오셨는지 그의 곁에 와서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훌쩍거리는 숨결에서 고구마순 김치 냄새가 왈칵 풍겼다.
고구마순 김치는 그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고구마순의 껍질을 벗겨 펄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낸 뒤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파 마늘을 다져 넣어 젓갈로 간을 맞춘 김치다. 이 김치의 특별한 맛은 장모님의 노하우에 달려 있다. 설탕 대신 복숭아와 양파를 갈아 넣어서 독특한 향과 맛을 내는 장모님만의 비법 말이다. 장모님이 만든 음식 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별미였다.
그런 김치 냄새를 맡으면서 그는 침을 삼켰다. 먹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일었으나 이미 말라비틀어진 몸은 말도 못 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식물인간이 된 커다란 벌레였다.
그런데 갑자기 천지가 진동할 정도의 큰 목소리로 장모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에미야, 장 서방 못 살겠다. 이 사람 이미 죽었다. 그리고 네 꼴을 봐라. 너도 죽어 가고 있잖니. 이게 사람 사는 집이냐. 집안 꼴도 이게 뭐냐? 산 사람이나 잘 살아 보자. 산소 호흡기를 떼고 이 사람 갖다 묻어 버리자꾸나.”
세상에! 이런 장모가 어디 있단 말인가. 배신감이 물밀듯이 밀려와서 외쳤다.
"제발 산소 호흡기를 떼지 말아요. 그거 떼어 내면 나 죽어요. 여보! 당신 어머니 말 듣지 말아 줘."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싹싹 빈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의식만 살아서 아우성을 쳤다.
[사고 이전과 이후의 모습]
아마도 내 아들도 저 책의 주인공처럼 무슨 말인가를 외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종종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