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만 있다면 밥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울 수 있다. 매끼 먹어도 질리지 않고, 일 년 내내 식탁에 올라와도 싫지 않은 게 바로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이다. 적어도 내게는.
"oo야, 너 결혼한 후에, 내가 너네 집에 놀러 가면 딱 한 가지 요리만 내놓아도 돼.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이면 돼. 기억해 둬."
가까이 지내는 지인의 딸에게 이런 농담을 할 정도로, 난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을 좋아한다.
오래전 일이다. 시어머니가 5년간 중풍으로 고생하실 때, 틈나는 대로 밑반찬을 만들어 택배로 보내드렸다. 시댁이 워낙 먼 곳에 있었고,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대신에 밑반찬을 만들어 보내면서라도 맘을 전하고 싶었다. 지금 같으면 온라인으로 주문하여 보내 드리면 편했을 텐데, 그때는 그런 게 없었다. 밑반찬을 만들어 보낼 때, 빠뜨리지 않았던 게 바로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이었다. 그것은 누구나 맛있다고 할 것이라고 속단했다.
"오메, 오메, 고추가 얼매나 매웠는지, 강아지가 구역질을 하여 회충이 다 올라와 버렸당께."
아뿔싸, 꽈리고추가 약이 오를 대로 올랐던 모양이다. 어머님이 택배로 받은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에 있던 고추가 너무 매워서 마당에서 키우던 강아지에게 던져 주셨던 모양이다.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을 볼 때마다 어머님 생각도 나고, 매운 것 먹고 얼얼하여 게워냈을 강아지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곤 했다.
오늘도 습관처럼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을 만들었다. 오늘은 양념장에 고추장을 빼고 볶아 보았다. 양념은 할 때마다 약간씩 변화를 준다. 나만의 황금레시피를 공개해 본다.
- 꽈리고추는 꼭지를 따고 잘 씻어 물기를 뺀 후에 포크로 구멍을 내든지 가로로 어슷 썰어 반으로 잘라 둔다.
- 잔멸치를 살짝 볶아 비린 맛을 없앤다.
- 양념장을 미리 만들어 둔다.
- 양념장 재료는, 간장, 맛술, 설탕(저는 거의 생략하는 편입니다.), 참치 액젓, 고춧가루와 고추장(이것이 일반적인 꽈리고추 멸치 볶음과 다른 점)
- 식용유를 팬에 두르고 중간불로 꽈리고추를 볶는다. 이때 가는소금으로 밑간을 해주는 게 팁이다. 꽈리고추에 양념이 잘 배도록 해야 한다. 고추가 어느 정도 익으면 약간 도톰하게 저민 마늘 편을 넣고 살살 볶다가 미리 만들어 둔 양념장을 끼얹는다.
- 꽈리고추에 양념이 푹 배도록 볶는다. 이때 양념이 졸았다 싶으면 물을 약간 더 넣어준다. 그러면 간이 적당해진다.
- 꽈리고추에 간이 충분히 뱄을 무렵에 미리 볶아둔 멸치를 넣고 주걱 두 개로 잘 저어주며 볶는다.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을 만들 때면,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또 있다.
중풍으로 고생하시던 시어머님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에 정신을 잃으셨다. 병원으로 갔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어머님은 아무런 말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셨다. 어머님의 부고를 듣고 달려간 곳은 장례식장이 아닌 시댁이었다. 이미 다른 형제들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어머님 영정 앞에서 꺼이꺼이 곡하며 울었다. 아무리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는, 끓어오르는 울음이었다. 효도를 제대로 못했다는 게 뼈에 사무쳤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은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할 때에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라는 말은 나를 두고 한 말 같았다. 어머님이 그렇게 일진 바람처럼 훌쩍 떠나실 줄 몰랐다.
그런데 아버님은 마을 상조계가 있다며 기어이 집에서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셨다. 그런 상조계는 오히려 없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건 내 생각이었고, 아버님 입장에서는 장례비도 아낄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다 도와주니 세상 편한 장례라고 생각하신 듯했다. 그렇지만 안 주인인 어머님의 빈자리가 바로 내 차지가 되고 말았다. 몰려드는 조문객들에게 식사 대접을 해야 하는데 마을 상조계 회원들이 일을 다 맡아서 해주긴 하지만 먹거리 재료를 준비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나는 울음을 뚝 그치고 상복 치마를 단단히 동여맸다. 40대 초반에, 나주 임씨 장수공파 17대 장손 며느리는 장례식 먹거리를 책임져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 됐다. 주방 한가운데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요, 이건 이거구요. 저건 저겁니다."
칠 남매 장남 며느리는 때가 되니 숨겨둔 발톱을 드러냈다. 노량해전의 이순신 같은 위상으로 일을 척척 헤쳐나갔다. 상조계원에게 사 올 물품을 적어 주고 이리저리 다니며 요리하는 일을 군두지휘했다. 내 속에 숨어있던 리더십이 발현되고 있었다. 그때, 영산포 시내로 장 보러 나가는 팀에게 잔멸치와 꽈리고추를 구해 오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주방 일을 하는 분들께 나의 비장의 레시피를 설명했다. 요리라면 식은 죽먹기인, 전라도 아주머니들은 내가 원했던 것보다 더 맛있게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을 해냈다.
양력 3월 초순, 그때 꽈리고추는 금값이었다. 어느 장례식장에서도 나오지 않을, 꽈리고추 양념장 볶음은 인기 폭발이었다. 아, 망했다. 맏며느리가 살림 거덜 내게 생겼다. 추가로 몇 번이나, 영산포 시내로 꽈리고추와 잔멸치를 사러 내보냈다. 조문객들은 겨우내 텁텁했던 입맛으로 있다가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에 꽂힌 듯했다. 무한 리필주문이 쇄도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그냥 간장을 넣고 만드는 꽈리고추 멸치 볶음도 맛있지만 칼칼하고 개운한 양념장과 어우러진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은 조문객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무사히 장례를 잘 치른 후에 집으로 올라오려고 자동차에 앉는 순간, 입술이 따끔거렸다. 벌에 쏘였나? 그게 아니었다. 신경 쓰며 맏며느리 노릇을 하느라 힘이 꽤 들었던 모양이었다. 일을 끝낸 순간 긴장이 풀리는가 싶더니 입술이 죄다 부르텄다. 입술 전체가 물집으로 가득해졌다.
어머님 장례식장을 빛냈던
꽈리고추 멸치 양념장 볶음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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