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은 아니지만 다소 별났던 손님
사람 상대하는 일을 하다 보면 정말 온갖 사람을 다 만나게 된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과 일 하지 않는 직업은 거의 없는지라 어떤 일을 하던 다른 사람과 부딪치게 되는데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는 스트레스를 줄이고 근거도 남길 겸 직접 부딪치는 전화보다는 이메일로 소통을 많이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카페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사람을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다. 좋은 사람이든 이상한 사람이든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하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정말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고 있다. 좋은 점이라고 하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므로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이야기를 해도 와닿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할 때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 하루종일 신경 쓰일 때가 있었는데, 외국어로는 어떤 얘기를 들어도 무덤덤한 대응이 가능하다.
이번 글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상하고 기이한 손님들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특별한 정보 전달이 목적인 글은 아니고 경험담 공유 정도가 되겠다. 손님의 행동, 태도에 따라 순한만, 보통맛, 매운맛으로 그 난이도를 구별해 보았다.
첫 번째, 순한 맛으로 주문 기억 못 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한 할머니가 아몬드 라테를 주문하고 결제 전 코워커가 이를 재차 확인했다. 결제까지 마치고 커피를 만들어 자리에 가져갔더니 '내가 언제 아몬드 라테를 주문했냐'며 다시 돌려보냈다. 주문서나 영수증을 다시 확인해 봤자 주문받은 사람 잘못이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럴 때는 그냥 다시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순한 맛 중에서도 순한 맛.
두 번째, 인사성이 너무 좋았던 독특한 손님. 이 손님은 들어올 때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본인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보였다. 이 얘기 저 얘기 두서없이 아무 말을 하다가 라테를 주문해 샷 뽑고 우유 스팀 치는 중에 갑자기 옵션을 바꾸겠다며 차이라테를 달라고 했다. 에스프레소 샷은 졸지에 버리게 됐지만 이 정도 주문 변덕은 상관없으니 원하는 대로 차이라테를 전달했다. 그게 고마웠던 걸까? 그녀는 thank you와 have a good day, you too를 각 10번 이상을 반복해 인사를 하고 나서 가게를 떠났다. 인사에 진심인 손님이었던 것 같다.
세 번째, 일명 아보카도 가이. 이번엔 중간맛이다. 지금은 발길을 끊었지만 한동안 매일 아침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사 가는 나이 지긋한 손님이었다. 매일 오는 시간이 일정했고 당시만 해도 가게 인력이 충분할 때라 그가 오는 시간에 맞춰 fresh 한 샌드위치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도착 시간이 5분, 10분씩 빨라졌다. 아무리 빨리 준비한다고 해도 시간이 걸리는 법인데, 그는 자신이 왔을 때 샌드위치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면 불같이 화를 냈다. '난 늘 이 시간에 오는데, 내가 오기 전에 준비를 해 놨어야지.'라는 말과 함께. 뿐만 아니라 이 손님은 일본 문화에 엄청난 환상을 갖고 있어 내게 자신의 일본 무용담을 늘어놓거나 가게에 오는 모든 동양인 손님에게 일본에서 왔냐고 꼭 물어보곤 했다. 자주 씻지 않는지 온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덤. 나를 비롯해 모든 코워커가 그 손님이 들어오면 최대한 숨을 쉬지 않기 위해 노력할 정도였다. 지난 9월 이후로 가게에 찾아오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네 번째, 토요일에 픽업할 샌드위치를 미리 주문하러 왔다며 찾아온 할아버지 손님과는 처음부터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웅얼거리는 발음에 목소리는 작고, 자꾸 다른 손님과 대화하는 중에 끼어들려고 해서 직원 한 명이 그 할아버지를 전담해야 했다. -샌드위치 어떤 거 원하세요? -그냥 아무거나 5개 줘. -그러지 말고 골라주셔야 돼요. -아무거나 싼 걸로 다섯 개 달라니까 그러네. 너네 몇 시에 오픈해? -저희 7시에 열어요. 몇 시에 픽업하실 건데요? -오픈부터 마감 사이에 아무 때나.
환장할 노릇이었던 대화를 마무리하고 카드 결제를 하는데 여기서도 또 다른 환장의 순간. 리더기에 카드를 제대로 안 갖다 대고 왜 안 되냐고 구시렁대더니 카드를 반대로 꽂아 결제를 하려고 했다. IC칩이 리더기에 안 들어갔으니까 당연히 결제가 안 되죠.. 반대로 끼워달라고 말을 해도 계속 이상한 방향으로 시도해 결국 내가 대신했다. 주문이 명확하지도 않고, 카드 결제 할 때는 이상한 고집을 부려 대단한 주문이 아님에도 시간을 한참 잡아먹었다. 이런 사람은 직원 한 명 붙잡고 한참을 안 놔주기 때문에 다른 손님에게도 피해가 간다.
다섯 번째, 대망의 매운맛이다.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일로 한가한 가게에 손님이 찾아와 괜히 반갑던 찰나였다. 평범한 커피, 디저트 주문이었고 커피를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손님이 상의 탈의를 하는 것이다. 날씨가 덥고 가게에 본인 말고 손님이 없다지만 나와 코워커가 두 눈 뜨고 지켜보는 와중에 상의 탈의라니. 차에서 다른 옷을 갖고 와 입길래 잠깐의 해프닝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코워커가 커피와 디저트를 자리에 갖다주고 돌아왔는데 당황한 표정으로 '저 사람이 우리 단골손님을 보더니 이상한 소리를 냈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슨 상황인고 하니 단골손님이(여자) 우리 가게로 걸어오는 모습을 보곤 어떤 소리를 낸 것으로도 모잘라(캣콜링 같은 소리로 추측하고 있다.) 주문하고 있는 손님의 모습을 부리부리한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계산대와 등지고 앉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몸을 돌려 손님의 뒷모습을 쳐다봤고, 그다음에 방문한 커플 손님 중 여자 손님을 마찬가지로 한참 지켜봤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봐도 위협적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는데, 이 손님의 행동은 꽤 위협으로 다가왔다. 사람 없는 가게에 코워커와 나 단 둘 뿐인데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여간 두려운 게 아니었다. 제발, 제발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코워커와 얼마나 빌고 빌었는지 모른다. 주문 가지고 뭐라고 하면 다시 만들어주면 그만인데 사람이 문제면 답이 없다. 해결 불가다.
스쳐 지나간 많은 손님 중 유독 별났던 다섯 명의 손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당연하지만 이 다섯 명의 손님이 유별났던 것뿐 대부분의 손님은 모두 친절하다. 특히 가게에 규칙적으로 오는 단골손님이라면 거의 코워커 급의 호흡을 자랑할 정도다. 다음 장에서는 호흡이 척척 맞는 단골손님들과의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의 이야기 보다 다소 즐거운 내용일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