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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쿡크다스 Feb 13. 2024

회식은 싫지만 무료 식사는 좋아.

호주 29 주차(24. 2. 2. ~ 24. 2. 8.)

2월 2일(금)
아주 오랜만에 마감하지 않고 조기 퇴근하는 날이었다. 마지막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하고 코워커들에게 뒤를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어찌나 여유롭던지. 집 근처에 학교가 있는 바람에 퇴근 시간과 학생들 귀가 시간이 겹칠 때면 도로에 차가 많았는데 오늘은 한산한 도로를 달릴 수 있었다. 


남편은 오늘 학교 영어 코스가 끝났다. 이제 약 2주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학위과정이 시작되는데 지난 6개월 동안 출석, 과제, 공부 모두 열심히 해 상도 많이 받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밖에서 맛있는 것을 사 먹기로 했다. 마트 가서 맥주 사고 냉동실에 넣어 놓은 동안 피시앤칩스를 포장하러 다녀왔다. 갓 나온 뜨겁고 바삭한 피시 앤 칩스에 차가운 맥주를 곁들여 먹으니 배부른 줄 모르고 피시 앤 칩스 모둠 하나를 뚝딱 해치웠고 후식으로 사 온 아이스크림까지 정신없이 먹으니 빵빵하게 부푼 배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호주 시간으로 밥 11시 30분에 아시안 컵 8강전을 하는데 남편은 이번 경기를 반드시 보겠다고 한다. 일찍 자고 중간에 일어나 경기 볼 거니 나도 중간에 볼 거면 깨우겠다고 하는데 과연 내가 중간에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2월 3일(토)

남편은 지난밤 경기 시작 시간에 맞춰 일어나 대 역전극이 펼쳐진 호주와의 아시안 컵 8강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했다고 한다. 골이 터지기까지 무려 90분이 넘게 걸렸는데 그걸 참고 기다렸다니 대단하다. 나는 중간에 일어나질 못 하고 그냥 잤는데 남편이 방에 나가고 들어오는 소리에 잠시 잠에서 깼다. 밤새 잠을 잘 못 자서 그런지 남편과 나 모두 피곤했다. 기상 시간도 평소보다 늦어서 어디 놀러 가진 못하고 남편 학교 도서관에서 각자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남편은 학기 시작까지 약 2주가량의 방학이 있고 학기 시작 이후에도 매일 학교에 가는 게 아니라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레주메 쓰는 거 도와주는데 새삼 내가 지금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운이 좋은 건지 느끼게 됐다. 호주에서의 경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일을 구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 도착하고 약 2주 만에 일을 구해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정말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겠다. 남편의 레주메를 보는데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내용이라 안타까웠다. 호주에서의 경력이라곤 학교 다닌 게 전부인 빈약하기 그지없는 레주메.. 그래도 레주메 완성한 게 어디냐며, 대신 아무런 기대는 하지 말라고 했다.  


내일은 가게 직원들끼리 회식이 있다.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회식은 가기 싫다. 게다가 일요일 저녁 회식이라니, 나는 월요일 아침부터 출근해야 하는데. 맛있는 음식과 술 무료로 먹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 


2월 4일(일)

회식 가기 전에 낮잠도 자고 비싼 거 많이 먹어야 하기 때문에 점심도 적당히 먹었다. 코워커 중 한 명이 집 근처에 살아서 가는 길에 픽업해서 같이 가기로 했다. 내가 차를 끌고 갈까 고민했는데 술을 마시고 싶어서 남편에게 운전을 부탁했다.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해서 미안했는데 남편이 당분간 할 일 없는 백수라 괜찮다고 했다.  


식당에 도착했는데 사복 입은 우리 모습을 보스가 낯설어했다. 늘 검은색 상, 하의에 앞치마 두르고 있는 모습 보다가 밝은 옷을 입으니 못 알아볼 법도 하다. 칵테일 한 잔을 시작으로 줄줄이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많이 먹은 건 아닌데 한 접시 씩 맛을 보다 보니 배가 금방 불러왔다. 다들 술 한 잔으로 취기가 올라오니 분위기도 함께 달아올라 실없는 농담도 하며 많이 웃었다. 그렇지만 내일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을 시작으로 하나 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고 나와 코워커도 8시를 조금 넘겨 자리를 떠났다.  


가기 전까지 구시렁대지만 막상 가면 제일 재미있게 노는 편인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회식 자리에서 가장 호탕하게 웃고 분위기를 즐겼다. 다음에 또 회식하면 참석하겠지만 참석하기까지의 발걸음이 너무나도 무거울 것이다. 


2월 5일(월)

시원하고 맑은 날씨라 밖에 나오는 손님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리만큼 하루 종일 조용했던 날이었다. 덕분에 코워커와 신나게 떠들고 바빠서 못 했던 유리창 청소를 할 수 있었고, 마감 무렵부터 손님들이 조금씩 와서 최악의 매출은 면할 수 있었다. 지난주 월요일도, 이번 주도 조용한 것을 보면 매주 월요일은 일주일 중 가장 덜 바쁜 날인가 보다. 


어제 회식에서 우리가 떠난 뒤에도 남은 인원들은 밤새 마시고 놀았다고 한다. 그중에는 오늘 일 하지 않는 직원도 있었지만 일하는 직원도 있는데 밤새 놀고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는 거지? 나이를 모르지만 분명 나보다 어릴 것이 분명한 게 나도 어릴 때는 밤새 술 마셔도 다음 날 멀쩡히 수업 들으러 간 적이 있으니.. 어린 나이라면 가능하다. 


내일은 가게 가서 코워커들에게 나눔을 할 건데 선물 받은 카레 페이스트랑 중국 전통 차가 둘이 먹기에는 많아서 나눠줄까 물어보니 다들 좋다고 했다. 거절하기 뭐 해서 그냥 달라고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뭐 그 속 뜻은 굳이 찾아내려 하지 않기로 한다. yes는 말 그대로 yes니까. 아침에 잊지 않고 잘 챙겨 가야지. 


2월 6일(화)

오늘 아침에는 쌀쌀했는데 내일부터는 다시 더운 날씨가 계속된다. 전에 같이 일 했던 호주애가 말하기로는 한주는 덥고 한 주는 시원하댔는데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까지 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호주 여름 습하지 않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40도가 넘는 기온은 불에 타는 느낌으로, 습한 여름 날씨 못지않게 사람에게 혹독하다.  


오전에는 매니저가 가게에 와서 잠시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따로 불러냈다. 관리하는 여러 지점 중 한 지점이 직원이며 매출이며 문제가 조금 있어 거기에 더 신경을 써야겠으니 나에게 내가 일 하는 지점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돈이나 많이 주면 하겠는데 굳이? 내가 가장 오래 일 한 크루라서 나에게 부탁한 것 같은데, 말로는 알겠다고 했지만 그냥 하던 대로 일 하려고 한다.   


요즘 코워커들에게 라테아트 알려주느라 바쁘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건 꽤나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게다가 영어로 그 원리를 설명하고 알려주려니 머리가 정말 터질 것 만 같은 순간이 생긴다. 정말 말로 잘 알려주고 싶은데 그걸 영어로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를 때 가슴이 참 답답하다. 그래도 매일매일 발전하는 코워커들을 보면 뿌듯하고 내 일처럼 기쁘다. 


남편은 호주 시간으로 밤 11시에 시작하는 아시안컵 4강전을 보겠다고 한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2월 7일(수)

어제 축구 보느라 늦게 잔 남편은 아침까지 늦잠을 잤다. 내가 출근하는 시간에 같이 일어나서 아침 먹는데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우리 졌어,라고 말하더니 다시 잠들었다. 아쉬운 결과라 많은 사람들이 잠을 못 이뤘을 것 같다.


오늘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일정하게 바빠서 체력적으로 조금 덜 힘들었다. 똑같은 매출이어도 일정하게 손님이 꾸준히 오는 날이 한꺼번에 손님이 몰리는 것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편하다. 기분 좋게 마감하고 쓰레기 버리러 가는데 우리 것이 아닌 쓰레기가 우리 쓰레기통을 꽉 채우고 있었다. 추측하기로는 옆 레스토랑인 것 같은 게 우리 가게에서 팔지 않는 맥주 및 잡동사니들이 버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제대로 된 분리수거도 하지 않는다. 호주가 한국처럼 철저하게 쓰레기를 분리 배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반쓰레기와 재활용이 가능한 것은 구분하는데 그들이 재활용 쓰레기 통에도 일반쓰레기를 넣는 것을 종종 보았다. 내 일이 아니라 참견하지 않았지만 우리 가게 쓰레기통에 자신의 쓰레기를 버리다니, 우리 쓰레기통 모자라서 맨날 꾹꾹 욱여넣는데.. 어떻게 할지 잠깐 고민하다 우리 쓰레기를 그들 쓰레기통에 버렸다. 속이 다 후련하다. 


퇴근하고는 장 보고 저녁 먹고 푹 쉬었다. 밥 먹으면서 보던 만화가 있었는데 드디어 세 번째 정주행이 끝나서 다음에는 뭘 볼지 고민 중이다. 재미있는 만화가 너무 많아서 고르기 어렵다. 


2월 8일(목)

오늘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까탈스러운 손님이 많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일 하는 동안 많은 손님을 상대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없었는데, 없는 메뉴를 해달라고 억지 부리는 사람을 비롯해 주문한 메뉴 가져다주는 족족 컴플레인을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차라리 몸이 힘든 게 낫지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손님 상대하는 건 정말 에너지 소모가 크다. 그래도 같은 상황,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코워커들이 있어서 든든하고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집에 오니 남편이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작년 7월 호주에 도착하고 일자리를 구한 후 '남편 학기 시작 전까지 등록금 벌기'가 목표였는데 다행히 그 목표를 달성했다. 한국 돈 환전하는 것보다 여기서 번 돈 여기서 쓰는 게 환전 수수료 및 환율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최대한 벌고 싶었는데 목표를 이뤄서 다행이다. 한꺼번에 큰돈이 통장에서 빠져나간 건 정말 아쉽지만 이 날을 위해 열심히 모아 온 돈이므로 다음 학기를 위해 또 다음 6개월 열심히 일 해야겠다.


더운 날씨는 내일과 모레 정점을 찍는다. 호주 여름 별거 없다고 말했던 거 취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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