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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쿡크다스 Apr 21. 2024

반년만에 듣게 된 할머니의 목소리

호주 30 주차(24. 2. 9. ~ 24. 2. 15.)

2월 9일(금)

오늘 아침에 알람이 안 울려서 늦게 일어났다. 한국은 오늘부터 설 연휴로 공휴일인데 '공휴일 알람 끄기' 설정을 했더니 알람이 안 울린 것이다. 지각하는 바람에 코워커가 어디냐고 전화하는 꿈을 꿨는데, 내 무의식이 알람이 안 울린 것에 대한 불안함을 느낀 건가 싶다. 어쨌든 꿈에서 지각한 게 현실인 줄 알고 놀라서 깼고 덕분에 늦게 일어났지만 제시간에 출근할 수 있었다.


창 밖만 봐도 햇볕의 뜨거움이 느껴지는 날씨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게를 찾아왔다. 요 며칠은 바쁘지 않아 시간이 잘 안 간 것에 반해 오늘은 시간이 빨리 가서 퇴근 시간도 금방 다가왔다. 마감을 안 하고 퇴근하는 날인데 워낙 바쁜 탓에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퇴근지만 마감 때는 워낙 할 일이 많아 코워커들이 힘들었을 거다.


너무 더워서 어디 나갔다가는 피부에 화상 입을 것 같다. 내일도 엄청 더운데 가급적 외출은 삼가여야겠다.


2월 10일(토)

한국은 오늘이 설 당일인데 호주에 있어서 그런지 실감 나지 않았다. 여기도 Lunar new year라고 구정 쇠는 아시아인 중심으로 설을 기념하기는 하지만 주류가 아니다 보니 어영부영 넘어가는 분위기다. 저녁에 간단히 친구들과 모여 맥주 한 잔 하기로 한 약속도 너무 더워서 취소하고 오전에 공원과 한인마트에 다녀온 것으로 외출을 마무리했다.


왁자지껄 한 명절을 보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식 없는 명절이 꽤 오랜만인 부모님이 심심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한 것에 반해 부모님은 여행을 떠나 즐거운 설 연휴를 보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즐겁게 지내는 것 같아 안심됐다. 떡국이 당기는 날씨는 아니라 떡국 대신에 떡볶이로 대신 명절 음식을 먹은 셈 쳤다. 한국에 있을 때 떡볶이는 친구들 만날 때나 가끔 먹던 음식이었는데 호주에 오니 자주 생각난다. 엽떡 맛을 낼 수는 없지만 떡볶이를 해 먹는다는 것 만으로 고향 음식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는 기분이다. 


더운 날씨에 밤새 에어컨을 틀고 자는데 남편은 너무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자다가 자꾸 깨고, 옆에서 남편이 깨니 나도 잠을 설친다. 며칠 째 수면 리듬이 일정치 않은 탓에 낮잠을 꽤 오래 자 버려 밤에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풍기로는 해결이 안 되는 더위라 에어컨을 틀고 자야 하는데 건조하고 차가운 에어컨 바람 역시 수면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무풍 에어컨 덕분에 참 쾌적하고 좋았는데.. 고심 끝에 구매하고 잘 썼던 한국에서의 가전제품이 너무 그립다.


날이 더우니 밥 할 기운도, 먹고 싶은 것도 없어서 저녁에는 피자를 한 판 시켜 먹었다. 시원한 맥주 한 병과 곁들여 먹으니 더위가 조금 가시는 것 같기도 했다. 내일도 별 일 없이 집에서 푹 쉬어야겠다.


2월 11일(일)

어제 깊게 잤던 낮잠 때문에 늦게 잠들고 새벽에 뒤척이는 남편 따라 잠에서 깬 바람에 평소보다 두 시간 이상 늦게 일어났다. 늦게 맞이한 아침이지만 부지런히 할 일을 다 했고, 평소보다 화장실 청소도 더 열심히 했다. 샤워부스 하수구에 낀 머리카락 뭉치도 꺼내고 물 때 낀 거울, 타일까지 광이 나게 닦아내니 속이 다 후련했다. 세차하면서는 곧 있을 차량 정기 점검에서 점검받아야 할 부분을 찾아보았는데 배터리, 전조등 밝기, 오른쪽 후방 타이어에 돌 박힌 것 등이 있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런지 제조 과정에서 접착제로 붙인 것들은 접착제가 녹아 떨어져 있기도 했다. 한국에서 타던 차는 아버님이 물려주신 거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탔는데 내 돈 들여 구매한 차라 그런지 뭐 하나라도 잘못되어 있을까 봐 신경이 많이 쓰인다. 부디 제발 아무 문제없기를!


어제 취소되었던 만남을 언제 재개할지 고민이 많다. 다음 주까지도 계속 더운 날씨가 예정되어 있다 보니 야외에서 만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더 미루다 가는 없던 일이 될 것 같아서 빠른 시일 내에 약속을 다시 잡으려고 한다. 원래도 집 밖에 자주 나가는 편은 아니었지만 날이 더우니 더욱더 집 안에만 머무르려고 한다. 


저녁에는 할머니에게 국제전화를 시도해 성공했다. 나는 호주식 알뜰폰 요금제를 쓰고 있는데 국제 전화 미포함 요금제고 할머니는 스마트폰을 쓰지 않아 카톡을 통한 연락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한국에 있을 땐 점심시간에 산책하면서 전화드리곤 했었는데 호주 온 이래로 단 한 차례의 연락을 드리지 못해 늘 마음이 쓰였다. 요금제를 바꿀 생각으로 알아보니 내 요금제에 단돈 5불만 추가하면 한 달에 무려 250분의 국제전화를 할 수 있길래 바로 결제하고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뚜르르릉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고 나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혹시나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릴까 봐 큰 목소리로 대화하다가 결국 보고 싶다며 울어버렸다. 이렇게 쉬운 국제전화를 지난 반 년동안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나도 너무했고, 무탈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이 되는 마음에 터져 나온 눈물이었다. 올해 아흔다섯을 맞은 할머니에게 내가 돌아갈 때까지 꼭 살아있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고, 할머니도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다고 약속했다. 옆에서 듣던 남편까지 울려버린 할머니와 손녀의 반년 만의 통화였다.


다음 주 로스터는 지난주와 동일하다. 반복적인 하루가 되겠지만 그 하루에서도 작은 행복 거리를 찾아 즐거운 한 주를 보내보려고 한다. 


2월 12일(월)

호주는 12월 말부터 1월 말 까지 크리스마스, 새해 연휴, 긴 방학, Australia Day 등의 행사로 많이 조용하고 2월이 되면 일상으로 완벽히 복귀하는 분위기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고 최근의 월요일과 다르게 꽤 바빠서 이제 원래대로 돌아가는구나, 생각했다. 보스가 오전에 잠깐 와서 커피 가져갔고 오후에는 사업 미팅을 하더니 떠나기 전에 나와 코워커에게 세뱃돈(?)을 줬다. 세배도 안 했는데.. 올 한 해 좋은 기운을 바란다며 무려 빨간 봉투에 돈을 넣어서 줬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평소보다 하루가 빨리 흐른 느낌에 저녁도 4시 30분에 먹고 운동도 빨리 끝냈다. 남편은 방학 동안 특별히 갈 데가 없어 집에만 있어야 하는데 심심해 보여서 걱정이다. 친구들이랑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놀 수는 없으니 집에만 있는 날이 많은데 나 없는 동안 뭐 하고 있는지, 외출을 전혀 안 하고 있으니 내색하지는 않지만 심심해 보인다. 일자리라도 구했으면 좀 나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모든 곳에서 거절을 받았다. 가게 가서 이력서 내고 오라고 하니 그건 부끄러운지 싫다고.. 나도 이력서 낼 용기가 안 나서 다른 방법으로 일을 구했기 때문에 차마 해 보라고 등 떠밀 수는 없었다. 그래도 개강하면 놀고 싶어도 놀 수 없으니 지금 이 여유를 즐기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2월 13일(화)

지난밤 잠을 설쳐서 오늘 아침에 반쯤 자고 있는 상태로 일을 시작했다. 애매한 날씨에 남편이 잠을 잘 못 자고 뒤척였는데 그 때문에 나도 잠에서 깨 한참을 자다 깨다를 반복했던 것이다. 피곤했지만 오전에 해야 할 일을 다 끝내고 코워커가 수다 떨면서 잠에서 슬슬 깨기 시작했다.


오전부터 보스가 와 있었는데 어제와 달리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고, 한참을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다가 돌아갔다. 정말 질리다,는 코워커의 표정이 너무 웃겨 한참을 웃었다. 보스는 굉장히 기분파인데 기분이 좋을 때는 입이 마르도록 온갖 칭찬을 늘어놓고,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 트집을 잡느라 바쁘다. 그 앞에서 그냥 네네, 하고 넘어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직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기밀 사항이다. 내일은 안 왔으면...


2월 14일(수)

어제만 해도 일주일 참 시간 안 간다고 생각했는데 수요일이 되니까 이제 이틀만 일 하면 된다는 생각에 신이 난다. 가게는 특별히 바쁘지 않았는데 더운 날씨에 더불어 어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기 때문인 것 같았다. 쉴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코워커와 효율적으로 일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눴고 배달 오는 디저트 관리에 있어서 합리적인 방법을 찾은 것 같다. 한참 일 하고 있는 중에 카톡이 한참 울리길래 보니 남편이 오늘 급하게 보러 갈 일이 있어서 차가 필요하니 퇴근하고 빨리 집에 와 달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코워커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감 청소를 다 한 후에 20분 정도 일찍 퇴근했다. 


할 일 최대한 다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코워커 혼자 두고 일찍 퇴근하니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내일은 내가 더 많이 일 해야지.


2월 15일(목)

오픈 준비를 마치고 코워커가 갑자기 오늘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조금 일찍 퇴근해서 쉬라고 말했다. 쉬라는 말에 감정이 폭발한 건지 갑자기 울면서 몸이 아픈 것 말고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있다며 일화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코워커는 영주권을 딴 사촌오빠네 집에서 사는데 그의 여자친구도 함께 거주 중이라고 했다. 여자친구는 프랑스 사람으로 사촌오빠가 그녀의 비자를 서포트해줘서 어린 나이지만 영주권을 바로 취득했고 두 사람이 연애한 지는 약 3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사촌오빠는 코워커에게 굉장히 잘해주고 그의 여자친구도 처음에는 친절했으나 코워커가 우리 가게에 취업하고 나서부터 갑자기 태도를 바꿨댔다.


그녀는 현재 직장에서 많은 shift를 받지 못하고, 코워커는 우리 가게에서 주 6일을 일한다. 코워커의 주 6일 근무가 시작되었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코워커의 일상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평소보다 늦게 퇴근하는 날에는 '몇 분이나 더 일 했냐', '시급은 얼마냐', '추가로 일 한 것도 돈 주냐' 등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가 질문하는 내용이 특급 기밀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공유 가능한 내용이지만, 아마 그녀의 말이나 행동, 표정에서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것만은 아니라고 코워커가 느꼈던 모양이다. 미묘한 질투, 미묘한 경쟁심 그리고 자신의 인사를 무시하는 것에서 코워커는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느꼈고 그 후로 집에 있는 것이 정말 불편하고 힘들다고 했다.


혹시 시세보다 저렴하게 방을 내어줘서 그게 불만인 건가 싶었지만 최근에 사촌오빠가 주변 시세에 맞는 방세를 요구했고 코워커는 그에 응했다고 한다. 사촌오빠도 여자친구의 불손한 태도를 알고 있고 그러지 말라고 말했으나 바뀌는 것이 없다고.. 20대 초반인 코워커에게는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이 꽤 큰 상처로 다가올 거다. 그 나이에 나도 그랬으니까.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는 일 하기도 싫을 거고 중간에 다른 코워커 오자마자 집으로 보냈다. 푹 쉬고 내일까지 몸 안 좋으면 내일도 쉬라는 말과 함께. 나를 싫어하는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게 쉽지 않겠지만, 그녀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보다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힘든 시간을 잘 버텼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오늘 진짜 엄청 바빴다. 손님 수는 적었는데 한 명 한 명이 대량 주문 하는 통에 정신없이 뛰어다녀 땀에 흠뻑 젖은 상태로 퇴근했다. 가는 날이 장 날이라더니 하필 아픈 코워커 한 명 빠진 날 바쁠 줄이야. 그래도 두 명이서 우당탕탕 마무리 잘했다. 힘들어 죽겠네.. 오늘 바빴으니 내일은 덜 바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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