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의 사치

모파상의 <목걸이>를 읽다 쓰다

by 시린

중학생 때 방학숙제로 받은 독후감 책 목록 중 하나였다. 제목이 재미있어 보여 모파상을 골랐다. 그의(그땐 그녀인 줄 알았지만) 단편에는 고전문학에서 흔히 보이는 권위의식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발견한 건 위트와 유머 감각,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따스한 시선이었다. 개학 직후 치른 평가시험에 <목걸이>가 지문으로 나왔고, 주인공의 성격과 주제를 묻는 문제의 답은 사치와 교훈이었다. 빨간 동그라미 or 엑스? 빨간색도, 사치와 교훈이라는 말도, 문학을 시험으로 만들어 수많은 청소년들을 문학에서 멀어지게 하는 학교도, 다 지긋지긋 싫어진 날이었다.


‘사치’는 재미있는 말이다. 주어가 누구냐에 따라 참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되기도 한다.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이라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말 속에 포함된 부정적인 의미 때문에 1인칭으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가십 등 3인칭으로 사용할 때가 대부분이며, 주어의 성은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다.


시험 때문에 책을 읽고, 작가의 의도(문제 낸 선생의 의도겠지.)와 작품의 주제(주관적 의견을, 객관식이랍시고 들이대는 보기 몇 개 중에서 고르라니.)를 발굴해 내야 하는 청소년기 잔혹사. 그 시기의 여파로 끝내 혐오하게 된 단어가 여럿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사치’다. 대체 말이 무슨 죄가 있나. 온갖 악한 감정을 담아 타인에게 던져대는 사람들이 가해자이며, 말 또한 손해가 막심하다. 게다가 2차 피해자도 셀 수 없다. 분수를 모르고 사치한 죄인으로 낙인 찍힌 <목걸이>의 마틸드, <마담 보바리>,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빨간 구두>의 카렌은 또 어떻고? 파티에 한 번 가는 게 소원인 가난한 아내, 예쁜 구두를 신고 싶은 소녀의 욕망이, 남은 평생을 고통받아 마땅한 죄라고?


말을 흉기로 사용하는 가해자로 인해 지나치게 많은 죄를 뒤집어쓴 ‘사치’들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 이제는 그네들의 억울함을 좀 풀어주려 한다. 일인칭의 사치가 필요한 시간이다.


직장 동료들끼리 송년회를 하기로 했다. J가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니 선물교환 이벤트라도 하면 어떠냐 한다. 작은 선물을 하나씩 준비해서, 추첨을 해 주고받자는 얘기다. 비싼 선물은 안 된다. 가격은 만원을 넘기지 말 것.


강의 가는 길에 다이소에 들렀다. 없는 거 없이 다 있다는 최고 인기 쇼핑몰. 천 원, 이천 원짜리 물건들을 파는데도 갈 때마다 몇만 원씩 쓰게 된다는 마력의 장소라지.

소문대로 북적이는 사람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데 초가 늘어선 진열대가 시야 끝에 들어온다. 지난번 여행에서 사왔던 티라이트 홀더가 꽤 오래 비어있던 참이다.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티라이트 12개 묶음이 천원. 흰색 바닐라향 초를 들었다가 내려놓고 녹색 애플민트를 들었다. 바구니에 담으려다 멈칫한다. 아니야. 이게 꼭,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니잖아? 요즘은 잘 켜지도 않잖아? 없으니 못 켠 거긴 하지만. 커다란 양초도 집에 몇 개나 있잖아? 홀더에 들어가는 사이즈는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예전에 쓰던 촛대는 어디로 갔을까? 주석이나 은으로 만든 촛대가 갖고 싶던 때도 있었지. 장발장이 훔친 게 은촛대였지? 신부님 덕에 용서받았던가? 그 후에 그 촛대는 어디로 갔을까? 그런데 내가 여기 뭘 사러 왔더라?


직원의 실례합니다, 하는 목소리가 녹색 티라이트 묶음을 한참동안 째려보며 서있던 정신나간 여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시간이 얼마 없다. 선물은 고르지도 않았는데. 얼른 초를 내려놓고 다른 진열대로 갔다.

잠시 뒤, 슬리퍼와 장갑과 찜질팩을 차례대로 들어 비슷한 시간 동안 째려보다가 간신히 계산대로 간다. 가는 길에 애플민트향 티라이트를 집어 계산대에 같이 내려놓았다.


오늘 할 일을 어거지로 끝내거나 내일로 미루고, 하루를 닫으려는 시간.

초를 붙여 유리공예 홀더 안에 넣었다. 주황 초록 파랑빛이 은근하게 반짝이고 엷게 사과향이 난다.


이런 걸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생활비 걱정과 앞날에 대한 고민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내일로 미룬 일도 버려야 할 쓰레기도 전부 그대로다.


할 수 있는 건 잠시 잊는 것뿐. 작은 초가 타는 동안 뭉친 어깨를 꾹꾹 누르며 긴장을 푸는 시간.

이만큼의 시간만이 필요했었다. 아무 쓸모없으나 나에게 필요했던 천원에 12개짜리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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