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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iO Mar 02. 2024

우리 엄마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

엄마

오늘같이 너무 피곤하고 힘든 날에는 엄마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영국에 산 지 20년이 훌쩍 지나버리니 세상 한가운데 전부였던 나의 엄마도 이제 나이가 드셔서 여든이 훌쩍 넘으셨다. 아직 어리광 부리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고 오늘 외국에서 영어 때문에 등신 같은 기분이었다고 징징대고 싶은데 한국에 있는 우리 엄마도 점점 더 아기처럼 되어가시는 것 같다. 점점 깜빡깜빡하시고 내가 했던 이야기도 잘 까먹으신다. 어제는 이석증 때문에 병원에 가셨다고 한다. 곁에 없어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던 막내딸이 좀 죄송스럽기도 했지만 나에게 엄마는 항상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무엇이든지 털털 털어버리시고 별거 아닌 듯 금방 일어설 거 같은 큰 존재였다.

그런데 오늘 카톡으로 대화 중 엄마가 적은 세글자가 내 심장에 쿵 소리를 내며 박힌다.


"무서워..."


엄마가 무서워하신다고?

평생 엄마에게서 첨 들어보는 말이었다. 울 엄마가 무서워하는 것도 있었나. 밤 12시가 넘었는데 안 주무시길래 왜 안 주무시냐 했더니 누우면  팽팽 돌 거 같아 무서우시단다. 그래도 엄마에게서 무섭다는 말은 첨 들어봤다. 항상 엄마에겐 힘든 일도 무서운? 일도 "그 까짓꺼!!"였다.


엄마는 41년생이시다.

6.25 전쟁을 겪으셨고 네 남매까지 집에서 출산하고 혼자 기르셨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니, 엄밀히 말하면 여자들은 굳이 교육을 안 받아도 된다는 옛날 시골 어른들의 무지한 사고딸을 초등학교 1학년만  다니게 하고 자퇴시키셨다. 물론 외심촌들은 다 학교를 시켰다. 어린 나이 때부터 학교를 그만두시고 남동생을 업고 집안일을 도왔다고 한다. 남동생을 업고 일을 하다 보면 저 멀리 교복을 입고 조잘대면서 학교를 가는 또래 친구들이 그때는 가장 부러우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어느 정도 나이가 차자 집안끼리 결혼 얘기가 오고 갔다. 소개팅 후 연애  두어 후 지금의 우리 아빠와 결혼을 하셨다. 별 다른 선택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떠한 성격인지도 잘 모른 채 결혼해 보니 아빠는 맏아들이라 할머니한테서 잔소리도 별로 안 듣고 자라셨고 모든 걸 기분 그대로 표출하면서 자라고 행동했던 불같은 남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결혼해서 남편이라는 울타리가 있었지만 울타리는커녕 그때에는 그냥 마냥 제멋대로 행동하는 불? 그 자체이셨다.

그 시대 많은 아빠들이 그랬듯 육아를 도우거나 집안일을 도우는 거 없이 가장으로서 위치만 존중받기 급급. 버럭 소리 지르실 때도 많았고 그게 아주 특권이듯 당연시했다. 맏며느리였던 우리 엄마는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모시고 임종 때도 다 혼자 수발하셨다.

울 엄마는 정말 현명하시고 똑똑하셨다. 글자를 성경책을 통해 깨우치시고 읽으셨다. 교육을 못 받았는데도 엄마의 말에는 사람들을 살리고 감동을 주는 힘이 있었다. 나이가 드신 할머니이신데도 교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찬양 인도도 당차게 하셨고 누구 앞에서든지 주눅 들지 않으셨다. 아마 시대를 바르게 태어나셨더라면 아주 큰 분이 되셨을 거 같다.

그 정도로 엄마는 나에게 큰 존재였고 뭐든 해결해 주실 거 같은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에게 기댈 수가 없었다.

여든이 넘어서니 하나, 둘.. 엄마의 약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를 보듬고 감싸던 그 큰 마음의 엄마 대신 우리 남매들이 엄마를 보살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 외국에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큰 실감을 못 했던 것 같다.


오늘따라 엄마가 보고 싶고 아니,, 사실 "엄마"라는 내 맘 속 깊은 그 이름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 엄마가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기댈 수가 없었다. 힘든 엄마 곁에 함께 해 주지 못하는 것이 죄송스러울 뿐 지금 내가 힘든 건 고스란히 나 혼자만의 문제로 그대로 감싸 안고 있었다.

그렇다고 남편에게도 의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혼자 방 안에서 엉엉 울었다. 사실 딱히 왜 우는지 뭐가 이리 슬픈지 뭐가 이리 힘든지 딱 한 가지 뚜렷한 이유도 없었다. 나의 여러 상황들, 그런데 난 이걸 헤쳐나갈 수 있는 당찬 내가 아니란 것, 이게 영어를 써야 하는 영국땅이라 그렇다고 나를 합리화시키고 싶었지만 우리 엄마를 생각해 보면 그것도 핑계일 거 같다.


엄마는 예전에 육아를 도와주신다고 6개월씩 두 번이나 우리 집에 오셨다. 영어 한마디 못 하시는데도 영국 로컬 사람 앞에서도 영국 교회에서도 엄마는 당차셨다. 예를 들어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영국 로컬 교회에서는 예배 도중 울거나 보채는 갓난 아기들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가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놀이방이 있었다.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좀 큰 아이와 한쪽 부모만 남고 남편이나 나는 항상 예배가 시작하면 보채는 둘째를 데리고 놀이방으로 갔다. 엄마는 사위나 딸이 주일날 예배도 못 드린다는 부분이 너무 안타까우셨는지 나한테 목사님한테 통역을 하라고 시키셨다.

"한국 교회에는 큰 유리창으로 만든 2층 방에 스피커가 들어오게 해서 아이를 보면서 예배를 드리게 한다. 유리창 방이 없다면 큰 티브이라도 들여서 화면으로라도 젊은 아기 엄마아빠들이 예배에 참석하도록 해야지, 교회 와서 이렇게 예배도 못 드리는 이 상황이 뭐냐"라고 통역을 하라고 하셨다. 물론 좀 더 부드럽게 목사님께 한국교회 얘기도 드리면서 설명을 드렸더니 목사님께서는 몇 십 년간 항상 당연한 듯 다들 받아들이고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몇 주 후 교회 놀이방에는 큰 티브이가 생겼고 예배 영상을 실시간으로 방안에서도 볼 수 있도록 연결되었다.

엄마는 길을 지나가면서도 항상 밝게 먼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할로우~~!"를 외쳤다. 그러던 엄마를 동네 사람들조차 엄마의 존재를 모르시는 분들이 없었을 정도로 우리 엄마의 아우라? 와 그 영향력은 뭔가 달랐다.  

내가 핑계를 대는 서로 다른 문화, 언어와는 상관이 없었다.


오늘따라 마음속 깊은 곳 기대고 싶은 "엄마...".  

난 아직 스물다섯 한국을 떠나올 때와 그대로인 것 같은데 이십 년이 훌쩍 지나고 나니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그게 너무 슬펐다. 더구나 난 오빠보다 십 년이 더 어리니 앞으로 십 년은 더 어리광 부리고 싶은데 말이다.


방 안에서 가족들이 들을까 봐 소리도 크게 못 내고 끄억끄억 울고 있는 나 자신에게..

오늘따라 해 주고 싶은 말.



지희야, 엄마도 다 이런 시간들이 있었을 거야.
외할머니는 여든이 넘으시고 치매였었잖아. 엄마는 어떠한 기분이셨겠어?
 이렇게 너도 어른이 되어 가는 거야.
그동안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낯선 나라에서 너무너무 수고했어.
다시 돌아가도 이렇게까지 못 했을 거야.

이제 남은 너의 삶과 미래...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바둥거리지 말고 지켜보자.

그리고 너무 힘들면 좀 쉬어가도 돼.
 넌 잘할 거고, 분명 2년 3년 후에는 행복하게 웃으면서
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거야.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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