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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iO Oct 06. 2022

눈치 안 보기?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

'남의 눈치 안 보고 사는 법'

'네가 하고 싶은 데로 해도 괜찮아'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법' 등등


요즘 꽤나 이런 비슷한 부분을 다룬 자아 지침서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사람들 눈치를 보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일 것이다.


왜 유독 '참지만 말고 자신을 돌보라'는 자아 지침서들이 많아지는 걸까?

이 부분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받았던 교육부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랐다.  다름 사람의 눈치를 잘 보도록, 그리고 민폐를 끼치지 않고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어른들이 뭐라 하면 무조건 "예"라고 하도록, 항상 착한 교회 권사님의 딸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라오지 않도록 교육을 받았었다.  이해는 간다. 우리 엄마나 우리 할머니 세대엔 그것보다 더 심하게 '본인의 삶이 없는 삶?'을 살았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자신 부모님도 아닌 남편의 부모님을 평생 모시고 네 명의 아이들과 함께 경찰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월급으로 살림을 하시가족들을 다 보살피셨다.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셔서 새벽기도를 가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시고 아침이면 아침식사와 함께 일곱 개의 도시락을 싸시면서 가족들을 출근, 등교시키시고 노부부를 하루 종일 돌보셔야 했었다.

거기에 엄마 자신의 삶은 없었다. 어릴 때  엄마는 항상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신 기억도 없이 항상 가족들 식사 준비로 부엌에서 분주하셨고 전작 본인의 식사는 언제 하신지 기억도 안 난다. 집에 과자가 있으면 엄마는 항상 안 드시고 싶다고 하시길래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과자를 못 먹게 되는 줄 알았다.  지금 보니 이렇게 좋아하시는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엄마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내 자신이 죽어서... 대신 이 가정을 이만큼 살렸다..."

난 엄마의 이 말이 싫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한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셨다. 하지만 한 알의 밀알이 되라는 말을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아예 없애고 남을 위해 헌신하고 살아라는 것으로 엄마의 삶에 적용시키셨다.  하지만 그 당시 그 상황에서 그렇게라도 삶을 위로할 수 있는 종교가 없었다면 엄마는 버티지 못하셨을 것이다.


러한 교육을 받으니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한다는 건 아주 무례하고 버릇없는 행동일 수 있다. 그리고 어른들 앞에서는 특이나 무조건적인 순종을 해야 했다.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지금 내가 어른이 되어보니 어린 아이보다 못한 어른들도 많고 어른이라는 건 나이가 먹으면 얻을 수 있는 특권인데 말이다.


근데 서양 국가랑 비교해 한국은 확실히 눈치를 보게 만드는 건 맞다.

처음에 영국에 와서 영어가 서투를 때 딱 맞게 영어로 표현할 수 없던 표현이 '눈치를 보다'라는 표현이었다. 비슷하게 설명하는 표현은 있지만 딱 맞게 이거다라고 떨어지는 표현이 없다. 일본어에도 空気を読む나 目を探る라는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말이다.

확실히 영국에서는 어릴 때부터의 교육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릴 때부터 나의 의견을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가르친다. 그래서 나이 한 살, 두 살 차이로 선배 후배, 위아래를 나누며 복종?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한국과는 달리 영국에서는 10년 20년 차이나는 나이라도 친구가 될 수가 있다. 나이는 그야말로 숫자인 것이다.


한국은 눈치를 안 보고 살기가 너무 힘든 것 같다.

옷과 유행만 봐도 그렇다. 여기서는 내가 추우면 여름에 패딩을 입던 유행 지난 스키니 진을 입던 요가복을 입던 아무도 신경을 안 쓴다. 그런데 한국만 가면 그 해 그 해 유행이 다르다. 그리고 그대로 따라 안 입으면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이 느껴진다. 한국에서 집 앞에 있는 필라테스 학원을 다니면서 여기에서는 평상복이던 요가 팬츠를 입고 다니는 길에 나도 몰래 찌릿찌릿한 따가운 시선들을 느끼게 되었고 어느 sns에서 요가 팬츠를 입고 다니는 부분에 달린 악플들을 보고 정말 안 보던 눈치가 저절로 보이게 되었다.  심지어 요즘 한국을 가니 주변에 골프를 안 치는 사람들이 없었다. 정말 내 주변에 다 골프 얘기뿐이었다. 골프 안 치면 대화에서도 왕따가 되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내 결론은 그렇다.

한국에서는 눈치를 안 보기가 참 힘들겠구나.


하지만 우리는 안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 거 중요하지 않다는 걸, 그리고 대다수가 생각하고 하는 부분이 다 옳지 않다는 것도 안다. 유행이 쉽게 변하든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도 다.


그럼 눈치 안 보고 바르게 사는 법은 무엇일까?

난 눈치 안 보는 것과 눈치가 없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눈치가 있는데 남에게 피해가 안 가는 선에서 내 소신껏 하는 건 멋진 것이다.

그런데 눈치가 없는 사람은 미친다. 다른 사람에게 민폐인데 본인은 모른다. 심지어 하고 싶은 대로 다 행동하고 말한다.


바르게 사는 삶은 어떤 걸까?

적어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나 자신은 무조건 헌신하고 남을 위해 사는 삶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또 눈치를 보지 말고 맘대로 살아라는 것도 아니다.

모든 상황들을 재빠르게 잘 파악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는 눈치를 가진건 축복이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뭐가 바른 지 기준을 정하고 소신껏 행동하자. 아닌 건 아닌 거다. 쓸데없이 따라 할 필요도 없다. 나 자신만 헌신을 해 가면서 남에게 맞출 필요없다.



내가 여기서 매일 일상복으로 입는 요가 팬츠를 

난 뭐 어때 하면서 한국에서도 잘 입고 다녔다.

딸이 "엄마 한국에서는 요가 팬츠를 바깥에서 입는건 좀 그런 거 같아"라고 말을 해도.

"뭐, 나라도 입고 다녀야 한국에서도 하루라도 빠르게 일상복으로 자리 잡을 거야" 란 똥고집을 가지면서...

나에게는 정말 체육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녔길래.


음...

하지만 이제는 좀 생각이 달라진다.

나의 행동으로 사람들의 눈을 너무 찌푸리게 한다면 그것 또한 남에게는 피해? 일 수 있으니 이제는 적당히 배려는 하는 게 맞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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