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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모솔새 Jun 15. 2021

논이 하나의 액자라면

매년 반복되는 똑같은 풍경이지만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번데기 시기를 거쳐 나비가 되고, 자연에서는 이런 일들이 매년 반복된다. 논의 한살이도 이와 같다. 논두렁의 안쪽에서도 매년 조금씩의 변주를 더한 논의 한살이가 펼쳐진다. 나비의 삶이 알에서 깨어나면서 시작된다면 논의 한 해는 모내기로부터 시작된다. 


 5월에서 6월, 한창 모내기를 할 시기가 되면 논에는 하나 둘 물이 들어찬다. 모내기 직전 맑은 물로 가득 찬 논은 마치 호수와 같다. 유난히 청명한 날 논에는 하늘이 비치고, 구름은 바람이 불 때마다 찰랑거린다. 자연스레 내 머릿속에는 김동명 시인의 '내 마음은 호수요./그대 노 저어 오오.' 하는 구절이 맴돈다. 너른 들 저 너머까지 펼쳐진 논들에, 제각기 조금 다른 하늘이 담길 즈음이면 나는 속도를 늦추게 된다. 


하지만 곧 모내기가 시작되면 구름은 다시 하늘로 돌아가 버리고 개구리밥이 수면 위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줄지어 심긴 모를 보면서, 누구네 집 모 심는 솜씨가 좋니 마니 속으로 생각하며 지낸다. 모가 자라나 수면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성해지면, 연둣빛으로 채워진 논의 모습에 내 기분도 싱그러워진다. 그러고는 이제는 벼가 된 그것들은 진한 초록빛을 띠었다가 황금빛으로 변한다. 넘실대는 황금빛 물결에 마음이 푸근해지는 때도 잠시, 벼 수확 이후에 논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이 된다.


여기서는 마늘이나 양파가 보편적인 이모작 작물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풀사료를 심어둔 겨울의 논이다. 벼 밑동만 남기고 비어있는 논이나 이랑을 따라 양파를 심은 논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해 보인다. 그러나 호밀이나 그라스, 보리는 겨울에도 촘촘한 초록빛이므로 나는 그 점에서 위안을 얻는다. 산의 나무들도 잎을 떨구고 가로수가 앙상할 때에 그들만이 푸르게 풍경을 장식한다. 이내 이들도 곧 소 먹이로 쓰기 위해 수확되고 마시멜로를 닮은 곤포 사일리지가 논 위에서 뒹굴거린다.


3월 초면 학교의 새 학기가 시작된다. 나는 지금껏 모내기도 어렴풋이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았다. 어릴 때는 달력을 보지 않았던 걸까? 서울에서 돌아온 뒤에야 그게 내 착각이란 걸 알게 됐다. 이곳에서 올해 첫 모내기는 4월 15일에 이루어졌다. 어디까지나 가장 빨라야 그렇다는 이야기고, 보통은 5월은 되어야 본격적인 모내기철이 된다. 이모작 작물을 심었다면 필연적으로 모내기는 더 늦어진다. 한창 알이 차오르는 양파를 캐서 어디 버리고 모내기부터 할 순 없으니 양파 수확 시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차례대로, 계절과 때를 기다렸다가 논의 모습은 점차 변해간다. 그럴 때 논은 마치 계절을 그린 그림 같아서 논두렁은 액자 테두리가 된다. 이 그림들은 매년 똑같이 반복되지만, 매년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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