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림 Sep 18. 2021

차덕후의 1년 루틴

저걸 사서 다 마신다는 게 더 놀라운 외화 탕진 기록

최근 몇 년간 중화권 차를 열심히 마시다 보니, 틴이나 종이 포장지에 든 서양식 홍차를 마실 때와 달리 공산품이라기보다는 농산물과 공예품의 중간쯤 되는 뭔가를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산물은 하우스 재배가 아닌 이상 필연적으로 계절에 따른 주기적 생산을 하게 된다. 특히 녹차처럼 신선도가 맛과 향의 품질을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인 경우, 소비자들도 생산 주기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소비자가 생산 루틴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차들도 있다. 백차나 보이차처럼 묵혀 먹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 대중적인 경우가 그렇다. 보이차는 동지에서 청명에 이르는 겨울을 제외하면 늘 생산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차테크 목적이라면 언제 생산된 차를 묵혀야 높은 시장가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하겠지만, 그냥 마실 목적이라면 별 상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내 경우에는 묵은 차, 노차보다 햇차를 좋아하는 개인적 특성도 있어서 올해는 열심히 퀘스트를 깨듯 때마다 생산되는 햇차를 들여 많이 마셨다. 아시아권 차들의 첫 수확 시기인 4월부터 시작하는 루틴을 다루고자 한다.


4월

4월 초순

중국 - 명전 녹차 출시 및 배송

중국 녹차들은 청명절(4월 5일) 전에 싹만 있는 찻잎을 따서 가공해야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한다.

실제 생산은 3월 말에 끝나는 것 같고, 4월에는 수많은 국내 수요를 소화하는 판매 기간으로 보였다. 그래서 해외에서도 청명절 부근에는 명전차를 받아볼 수 있었다.

명전차들은 대부분 찻잎 자체가 싹인 상태에서 땄기 때문에 맛도 여리고 맑고 외적으로도 이렇게 갓 나온 싹을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땄을 것을 이렇게 막 먹어도 되는가 싶을 정도의 솜털 가득한 싹의 모습을 한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내가 올해 산 차들은 다음과 같다.

신양모첨 50g

서호용정 250g

몽정감로 100g

중국은 땅이 넓으면서 차가 메이저인 나라고, 그 중에서도 녹차가 대메이저인 곳이다. 그래서 내가 사보지 않은 녹차들도 많은데, 내년에는 몽정감로의 상위호환이란 평판이 있는 벽라춘을 사보고 싶다. 하지만 은근 녹차가 매일매일 손이 가는 게 아니라서… 250g 단위로 산 서호용정은 냉동실에 절반 이상 남아있고, 녹차의 상미기한이 1년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한꺼번에 지른 과거의 나 자신이여~~ 하고 원망도 해본다. 하지만 용정차는 정말 햇차라야 맛있는데 250g 단위로만 팔아서 곤란함이 있다.

중국 - 태평후괴 출시

청명절이 좀 지나면 태평후괴 및 일반 보급형 녹차들을 여기저기서 팔기 시작한다. 태평후괴는 가격도 중국 내 인기있는 차들보다는 낮은 편이고, 한국인 입맛에 가장 익숙하면서 눈도 즐거운 차이다. 그러나 명전차 소비에 압박이 있어서 상미기한에 약간 여유가 있는(1년 6개월) 차에는 결국 손이 덜 가고 말았다.


4월 20일 (곡우)

한국 - 우전 녹차 및 세작 출시

중국에서 찻잎 수확 시기의 상품성 기준을 청명절(4월 5일)로 잡는 것처럼, 국산 녹차도 24절기 중 곡우(4월 19-20일)로 잡혀 있다. 곡우 이전에 찻잎을 따서 가공한 차를 우전이라고 부른다.

한국은 아무래도 차가 메이저인 나라는 아니라서 경험상 우전차는 곡우 조금 지나면 생산이 완료되고 판매하는 느낌이 있다. 우전차는 50g에 최소 5만원이상, 대기업 브랜드인 오설록의 경우 60g에 8만원으로 적은 단위 및 비싼 가격으로 파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쟁여놓고 마시다가 썩은 낙엽이 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이유로, 연중 어디선가 싸게 팔거나, 관광지에 가면 기념으로 사오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4월 말

일본 - 센차 출시

일본 차 브랜드 및 생산자들도 이때쯤 되면 일본식 녹차인 센차의 예약을 받기 시작한다. 내 경우엔 센차도 예약까지 해서 마시는 차는 아니고 특유의 바다짠내가 그리울 때 루피시아 티박스에서 꺼내 조금 마셔주는 정도이지만 트위터 덕후들 사이에 예약 링크가 이쯤 돌았던 것 같다. 일본 녹차는 단짠이 있어 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특히 평판이 좋은 편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은 브랜드를 몇 가지 소개해 본다.

https://www.ippodo-tea.co.jp/​ 잇포도​(교토)

https://www.e-ochaya.net/shopping/​ 야마시나(큐슈)​


5월

중국 및 대만 - 우롱차 신차 출시

우롱차는 좀 잎이 커져야 상품성이 있기 때문에 무이암차, 대만 우롱차들은 대체적으로 5월에 햇차가 나온다. 다만 녹차 정도로 신선함이 맛의 알파이고 오메가인 건 아니라서 이쪽도 딱히 햇차를 기다려서 사진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중국에서 나오는 철관음이나 봉황단총 같은 청향 차들은 이 시기에 나오는 신차를 따로 라벨링해서 판매되는 편이고, 무이암차 같은 농향 차들은 상대적으로 신차가 덜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중국 - 금준미 신차 출시

홍차는 다즐링 퍼스트 세컨드 따지는 게 아닌 이상 개봉 후 빨리 마시는 게 좋을 뿐 햇차를 마시는 데 그렇게까지 의의가 있진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금준미는 정산소종 차나무의 싹만 따기 때문인지 또 신선한 차가 더 맛있긴 하더라. 물론 그냥 사기엔 좀 사치스러운 가격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싼 다즐링 퍼스트 플러시 같은 것보다는 돈 쓸 만 하다고 생각했다.

서호용정이나 금준미 같은 초유명차들은 가짜도 많아서 QR코드를 찍으면 생산 정보를 온라인에서 볼 수 있다
너무 비싼 나머지 털 및 찻잎 조각도 한올한올 아껴가면서 마셨는데 거의 다 마시다니 따흐흑

6월

6월 초순

대만 - 동방미인 여름차 출시

동방미인은 여러 차들 가운데 출시가 가장 늦은 편이다. 여름차는 4월 말쯤 예약하면 6월 초에 받아볼 수 있다. 그냥 사는 것보다 예약하는 쪽이 가격적으로 유리한 편. 동방미인은 묵혀먹는 게 맛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내 경우엔 차종을 불문하고 신선한 차를 냉침해서 막 마시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비싼 차를 마시고 있는 것 같지만(…)

6월 18일

중국, 대만 - 쇼핑몰 여름 세일

중화권에서 11월 11일 광군제를 제외하고 가장 큰 할인이 들어가는 세일 기간이다. 꽤 많은 쇼핑몰에서 행사를 하는 것으로 보이며 6월 18일이 있는 날짜 기준으로 3-7일 정도로 잡는 것 같다. 왜 6월 18일인 지는 모르겠으나 외화 탕진러는 세일해주시면 감사히 받을 뿐. 왕덕전은 광군제보다 이 때 세일을 더 크게 하는 것 같았다.(대우령 20% 할인 사느냐 마느냐 크게 고민하다가 안 사면 100% 할인이라는 생각으로 사지 않았다.)

타오바오 같은 경우는 한달에 한 번 자질구레한 세일기간이 있는데, 이 때가 보통의 세일 기간보다 할인 폭도 크고 참여하는 셀러도 많다.

대우령 대신 산 다람쥐 찻잔

7월

중국, 대만 - 자스민차 출시

자스민차는 엄밀하게 말하면 자스민꽃 향을 입힌 녹차나 우롱차인 경우가 많지만, 자스민꽃 자체가 여름 생산이 대세라 차도 이때쯤 많이 나온다고 한다.


한국 - 차문화대전

국내에서 차 및 다구를 주제로 하는 가장 큰 박람회이다. 중년 고인물 대잔치에 젊은 여자가 가면 박대하기로도 유명한 행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국내에서 소규모로 생산되는 차나 다구를 한꺼번에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퀄리티를 떠나 해외 생산이나 국내 생산이냐가 접근성 및 전반적인 경험에 미치는 차이가 크기 때문에, 차를 마시고자 생각한다면 국산차를 한번쯤은 체험하고 호불호를 결정하는 과정이 있는 쪽이 좋다. 보통 여름에 코엑스에서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 4차 대유행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8월

중국, 대만 - 중추절 월병 예약

올해는 해외에 나가질 못한 탓인지 심지어 차이나타운 같은 곳까지 월병 붐이 불었다고 한다. 디저트를 나눠먹는 풍습은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의 월병 붐에 대해서는 이쪽에 자세하게 적었다.

https://brunch.co.kr/@5ducks/23



9월

일본(루피시아) - 티백 100종 세트 예약

루피시아의 매력은 가향차의 종류가 엄청나게 많고 가격이 비싸지 않은 데 비해 품질이 그럭저럭 괜찮다는 점이다. 다만 요즘은 여러 모로 해외 직구러에게 친절하지 않아 조금씩 자주 사는 패턴으로는 좀 어렵긴 하다. 원래 루피시아는 tea of book이라고 해서 티백 모음을 책처럼 엮은 세트가 인기가 많은데 그것보다는 늘 9월 초중순에 예약받는 100개짜리 티박스가 가격 대비 구성이 충실하다는 느낌이 있다. 아마 9월에 예약하면 10월에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72색 색연필이나 팬톤 컬러칩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을 굉장히 자극하는 패키지 디자인이 훌륭하다. 아무리 차 좋아 인간이라도 바쁘고 기력없으면 티백을 마시게 될 때가 있다. 그런 때 가챠처럼 랜덤으로 뽑는 재미를 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러나 아직 나에겐 70개의 티백이 남아있는데….


11월

11월 11일

아시아권 - 광군제 및 singles day

가장 큰 세일 기간이라 차덕후 뿐만 아니라 모든 해외 직구러들이 선덕선덕하는 기간이다. 대부분 세일하는 브랜드는 중화권 위주이나 싱가폴 브랜드인 twg도 블프보다 11월 11일을 택해 30% 언저리로 세일을 하는 편.


11월 셋째주 금요일

미국, 유럽권 - 블랙 프라이데이

대부분의 서양 홍차 브랜드들 및 유럽 도자기 브랜드들이 큰 폭으로 세일하는 기간이라 영국, 프랑스, 미국 브랜드 차를 사고 싶다면 이쪽을 이용하면 된다. 내 경우엔 최근엔 아시아권 차나 브랜드로 많이 옮겨와서 블프에 차는 덜 사게 되는 편인 것 같다. 정산당 같은 경우는 해외 전용몰이라 그런지 작년엔 광군제가 아닌 블프 기간에 세일을 크게 했었다.


12월

대만 - 동방미인 겨울차 출시

특이하게도 동방미인차는 여름 말고 겨울에도 신차가 한 번 더 나온다. 역시 11월 중순에 예약구매하면 연말연시 즈음에 도착했던 것 같다. 맛은 여름차가 더 좋다는데 나 자신이 생산 시기별 특성을 직접 느낄 내공은 없었다. 가격은 겨울차가 조금 더 비쌌던 것 같지만 농산물 가격이라는 게 그때그때 다르니 이것도 완전 확실친 않을 듯.


12월 22일(동지) 이후

대부분의 지역에서  차가 생산되지 않는 기간으로 사둔 차를 열심히 소비한다. 2 14 발렌타인데이때 세일하는 브랜드가 있긴 하지만, 이미 11월에 사재기를 해뒀을 테니 먹을 만큼만 사자고 생각하며…(상미기한  소비하지 않은 차는 썩은 낙엽일 뿐이므로)

이전 19화 차생활 참고서적 및 자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