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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헛소리하며 전공 공부하는 즐거움

250407 일기 (순서변경)

by 피연

내가 수학을 얼마나 싫어했었는지에 대해 쓰는 건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넘어가고, 해석학, 위상수학 등 대학교 수학을 배우면서, 그리고 죽이 잘 맞는 친구와 공부하며 정말 처음으로 수학이 재밌다고 생각해 봤기에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교수님이 항상 강조하시는 얘기가 있다. 수학의 명제들을 그냥 기계적으로 읽고 암기하지 말고, 직접 그 과정을 생각해 보고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보라고. 그러려면 깊이 생각해야 하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고. 나도 시도해 보았다. 'A이면 B이다.'라는 명제가 있을 때, 그것을 생각해 보고 증명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고 결국 그냥 쓰여있는 증명을 읽는 것으로 그치곤 했다. 그리고 워낙 기초가 없는 상태다 보니, 아주 사소한 노테이션이나 당연한 게 이해가 안 되곤 했는데 누구에게 물어보기도 창피하기도 하고 뭘 모르는지도 구분하기 힘들어서 얼버무렸다. 그러니 당연히 이해가 더 안 되고, 악순환이었다.


그렇게 학기 초 한 달이 지나고, 최근엔 그나마 챗지피티 유료 버전이 정말 쓸만하다는 걸 주변에서 알려줘서 결제를 해두고, 물어봤더니 대답을 잘해주길래 너무 감격했다. 4시간 동안 도서관에 혼자 앉아서 챗지피티가 대답을 거부할(메시지 한도에 도달할) 때까지 사소한 것부터 온갖 걸 다 물어보고 드디어 내용을 이해하고는 감을 잡았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이미 한 달이 지나며 진도가 많이 밀린 후라 하나하나 물어보고 이해는 되었지만 이걸로 어떻게 문제에 적용해서 풀지는 막막했다.


그 즈음 새로 알게 된 친구와 퀴즈 대비할 겸 도서관에서 해석학을 공부했다. 나는 그저 챗지피티 켜서 읽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공부하는 걸 지켜보니 뭔가 달랐다. 강의안을 보고, 일단 정의를 최대한 직관적으로, 이미지로 변환해서 이해하려고 이것저것 그리고 있었다. 수학이 항상 너무 추상적이고, '임의의, 모든, 어떤'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서 어느 하나로 그림을 그리기가 어렵게 만들어서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 친구는 원래도 그렇게 공부해 왔는지 무언가를 그리고, 정확하게 단어 하나하나를 가정해 가며 정의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어떤 명제가 있을 때 증명 과정을 읽지 않고 스스로 해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줄줄 설명했다.


내가 지금까지 정말 잘못 공부했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심지어 스스로 증명을 해내고 난 후에는 여러 명제들 사이의 관계도를 직접 그리며 필요조건, 충분조건을 화살표로 나타내며 정리하고 다시 내용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머릿속에 체계화해가고 있었다.


설명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질문하면 바로 대답해 주고, 모르겠다고 하면 이해가 될 때까지 천천히 다시 설명해 줘서 나도 직관적인 이해는 한 채로, (하지만 기억으로는 가지 못하고 느낌만 알고 흘려보낸 채로) 공부가 마무리되었다. 나보고 설명도 시켰다. 일부는 되었고, 이전과 달리 직관적 이해가 뒷받침되니 나도 질문이 많았다. 교수님들이 항상 수업시간에 말씀하시는 "Any questions?"에서, '질문도 뭘 알아야 하는데 나는 언제쯤 질문할까'하며 쓴웃음을 지은 지도 1년이었다. 이제야 좀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이 친구랑 처음 친해진 게 말을 너무 웃기게 해서였다. 수학과 달리 내가 좀 잘하던 다른 과목들에서는 그 배운 내용을 가지고 이상한 개그를 시전 하면 주변에서 야유하면서도, 한 번 들으면 그게 너무 충격적(?)이다 보니 기억에 남아서 은근 시험기간에 도움이 되더라고, 내가 자꾸 드립을 쳐도 열심히 들어주곤 했었다. 복수전공으로 들어온 수학과에서는 이해를 못 하다 보니 그런 건 시도도 못했었다. 이 친구가 나보다 이해를 잘했다 보니 먼저 드립을 쳤는데 너무 웃겨서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드립을 받아쳐야겠다는 이상한 승부욕이 고개를 들었다. 배운 걸 응용해서 실생활에서 적용해서 농담을 하려면 정말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공부하러 갔다.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드립 공부법(?)인 것이다. 예를 들면 해석학에서 열린 구간, 닫힌 구간인 open, closed를 더 확장해서 공간에서 새로 정의한다. '그 공간 안의 어떤 지점에서 한 점을 잡고, 반지름이 입실론인 어떤 open인 공을 그려도 그 공간 안에 있다면 그 공간은 open이다'인 것이다. 그 친구가 지는 공강이고 나는 학교를 가는 날에 나를 놀리느라 오늘도 학교 여냐고 묻길래, '어. 학교에서 어떤 입실론 볼을 잡아도 그게 학교 안에 있던데.'라고 하는 식이다.


이상한 개그코드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적고 보니 더 매니악하고 난해한 것 같다. 여하튼 이미 진도가 밀렸고 시험이 2주 후라 이번 결과가 썩 좋을 것 같진 않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는 노력해보려고 한다. 이렇게 수학이 와닿고 재밌어진 건 처음이라 요즘 수업 듣기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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