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책을 다시 사볼까

250511 일요일 일기

by 피연

예전에 책 사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땐 상대적으로 주거에 대한 걱정이 덜했고, 지금보단 여유가 있었으니까. 금전적 여유가 없어지고 내 공간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책 같은 사치재가 없더라. 사지 않고도 빌려 볼 수 있고(대안 존재),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은 없으니까(필수 아님). 심지어 산 책은 안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활용도 떨어짐). 그래서 웬만한 책은 빌려서 보고, 책이 갖고 싶어도 활용하지 못할 걸 생각하며 서점에서 결국 내려놓고 나온 적이 여러 번이었다.


최근 정리에 재미를 붙였다. 미니멀한 삶의 깔끔함에 빠져서 처음으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닌 비우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내게 필요한 물건이 어떤 건지 취사선택하고, 많은 물건을 버리게 되면서 생각보다 짐이 단출해졌다.


나에게 글이란 언젠가부터 오래전에 보고 온 영화 티켓과 같았다. 너무 소중해서 글 없이는 못 산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마치 지난 아주 먼 날처럼 느껴진다. 들여다보면 그때의 장면들과 습관이 생생한데 이미 본 영화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책갈피처럼 다이어리 한구석에 꽂아둔 그 영화표는 잊혀갔다. 언젠가 버린 것도 같고.


딱히 뭘 바라고 정리한 건 아닌데 물건이 사라지고 나니 깔끔해진 방 안에서 나는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있다. 많은 것을 비우고 그 영화표가 뜻밖에도 눈앞에 나타난 셈이다. 재개봉이라도 한 이.


책은 다시 살 일 없을 거라는 내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옷은 입다 질려버리고 먹을 것은 없어지며 어떤 물건은 쓸 일이 없어진다. 버리고 팔아버리고 나니 결국 남는 게 책이었다.


여전히 빌려보는 게 짐을 안 늘리는 길이라며 억제해 오고 끌리는 표지도 지나쳤다.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관심 가는 영역도 항상 변할 텐데, 책을 아예 안 사버리면 진짜 나의 취향이라는 게 집에 안 남는 것 아닌가. 반납하고 스쳐 지나간 책들 일부러 기록을 찾지 않으면 평소에 잘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은, 한 번 읽고 꽂아만 둘지라도 책 등을 보며 내용을 떠올리게 된다. 되새기게 된다.


전자도서도 좋아하고 이북리더기로 읽는 게 최선이라 여기기도 했지만 종이책만이 줄 수 있는 물성을 다시 소중히 여겨보기로 했다. 너무 많이 사거나 욕심이 된다 싶으면 다시 팔고 나눠주고 버려야겠지만, 그만큼 엄선된 책들만 사 올 것이다.


그 김에 합정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두 권이나 샀다. 사실 5권 넘게 사고 싶었지만 욕심이라 내려놓았다. 다른 곳에 써 없어지는 돈보다 값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납 기한이 무기한이라는 것이 주는 편안함과 내 소유라는 느낌, 새 책의 냄새를 오래 잊고 살았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