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수어, 당신과 수어로 대화하는 날이 오기를
무엇에 관심을 갖고 깊이 빠지다 보면 그 길에서 우연한 기회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내 머릿속은 온통 수어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특정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하다면, 누구를 만나 대화를 하든 곧 그것과 연결되게 된다. 누구와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하든 이야기는 계속 수어로 이어졌다. 그러다 우연히 대화 상대가 수어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대화는 한층 깊어진다. 한 선생님과의 대화가 그랬다. 수어를 배우고 있다고 하니 본인도 예전에 수어를 배운 적이 있다고 한다. 무려 1시간 30분이나 걸렸지만 서울농학교까지 가서 수어를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건 출장을 달고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서울농학교는 아이들에게만 수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교직원과 시민들에게도 수어 강좌를 제공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수어를 알면 아이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분명 도움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생님은 당시엔 서울농학교에서 초급부터 고급 수업까지 진행했다며, 지금도 하는지 함께 공문을 찾아보자고 했다. 찾아보니 정말로 있었다.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은 입문자들이 듣는 수업이었다. 나는 교직원을 위한 중, 고급 수업을 알아보기로 했다.
서울농학교 안에는 국립청각장애교육지원센터가 있다. 센터에 당장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oo에서 근무하는 oo입니다. 수어 교육 관련 공문을 보고 수어를 배우고 싶어서 연락드립니다. 제가 참석할 수 있도록 공문을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컸다. 수어를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으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돌아오는 답변은 긍정적이었다.
"당장 이번 주부터 오세요."
센터장님의 호의적인 태도에 조금 놀랐다. 내가 당시 교육청 소속 직원이어서 그랬을까? 속사정을 들어보니 점점 청각장애학생이 줄어 학생 유치가 쉽지 않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청각장애학생에게 홍보를 하려던 게 한몫했던 것 같다.
"관리자님께 출장 문의 후 가능한 날부터 가겠습니다."
나는 당장 출장이 가능한지 문의했고, 여비부지급으로 출장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근무 중에 좋아하는 것을 배우러 갈 수 있다는 것, 이게 가능했던 건 특수교육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특수교사라는 직업 덕분에 다음 주부터 서울농학교에서 수어를 배우게 됐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 103, 서울농학교에 도착했다. 전공 책에서나 들어봤던 학교에 직접 가게 된 것이다. 방문증을 발급받고 들어가는 길에 100주년 기념비를 만났다. 수어로 '100'을 나타내는 기념비가 멋져 보여 한컷, 두 컷 사진을 찍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국립청각장애교육지원센터가 나온다. 먼저 센터장님을 뵈었다. 각종 홍보자료와 굿즈, 책자를 주시면서 먼 길 와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았다. 내가 되려 감사한 일이었다.
중급반 수업은 40분간 진행됐다. 교직원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P목사님이셨다. 나의 두 번째 수어 선생님, 선생님은 항상 프린트물을 해오셨다. 20개 정도 되는 관용 표현을 배웠는데, 수어 하나가 반복적으로 들어가는 관용 표현이었다. 그날은 '죽다'라는 수어가 들어간 표현을 배웠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배고프다 + 죽다'는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추측해서 뜻을 이야기하면 맞는 표현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예를 들어주셨다. '배고프다 + 죽다'는 죽을 만큼 배가 고프다는 뜻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기본적인 수어였지만 농인과 직접 만나서 배우는 것, 다양한 표현을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익한 시간이었다.
1시간 30분을 가야 들을 수 있는 수업이었지만 가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어를 배우는 교직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수어를 배우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교사에게 수업할 때 학생들에게 수어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물었는데, 대부분 수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학생들이 수어를 배우기 위해 농학교에 간다고 생각했는데 수어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이 충격적이었다. 이유는 학생들이 인공와우 수술을 하면서 대부분 소리를 어느 정도 들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어로만 소통하는 아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그 수요가 줄어든 만큼 수어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 수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줄고 있었다. 수어에 빠지기 시작한 나로서는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수어를 쓰는 사람이 적어지고, 곧 필요가 없어진다면 나는 수어를 왜 배우고 있는 걸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대로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걷고 또 걷다가 한 책방에 들어가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수어를 배우지?' 한참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선생님과 통화를 하게 됐다.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니 선생님은 이렇게 물었다.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적어져서 수어를 배우지 않을 건가요?"
"아뇨. 배우고 싶어요."
내 대답은 생각보다 빨랐다.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적어지는데 왜 배우고 싶어요?"
"그냥, 재미있어서요."
"그럼 답이 나왔네요.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해 봐요."
"^^ 네"
나는 그저 그냥 해보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날의 고민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돌고 돌아 답은 매번 같다. 그냥 재미있어서, 내 마음이 가서 수어를 배우게 된다. 무슨 뜻이 있길래 계속 나를 수어의 길로 데려가는지 모르겠다. 그저 나는 그 길을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무언가 크게 이루는 게 없더라도, 소중한 언어 하나 보존하는 한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 아닐까. 그렇게 한 명이라도 더 이 좁은 길을 함께 걸어갔으면 한다.
나는 오늘도 당신이 수어에 관심을 가지고 수어를 배웠으면 한다. 언젠가 당신과도 수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날이 오길, 더 나아가 수어로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