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의 세상에 살다 나온 기분
2024년 7월 27일, 수어통역사 필기시험 날이다. 여태 공부하며 정리했던 노트를 챙겨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나왔다. 하늘이 맑은 게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양공업고등학교에 가까워오자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학교 안까지 차가 들어갈 수 없어서 교문 앞에서 내려야 했다. 모두 나처럼 시험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파란 하늘에 예쁘게 뜬 구름을 보며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1층 현관에서 수험번호를 찾는데, 번호가 정말 많았다. 알고 보니 900명 넘는 사람들이 응시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어에 관심이 있었다고?' 새삼 놀라웠다. 수험실로 향하는 길,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했다. 농사회는 생각보다 좁아서 한 다리만 건너도 서로를 알게 된다. 서울수어전문교육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분들, 협회에서 만났던 분들까지 다양한 분들을 만났다. 눈인사를 나누고 "오늘 시험 파이팅하세요!" 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해 요약 노트를 보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학생들부터 백발의 할머니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었다. 수어통역사 필기시험은 장애인복지, 한국어의 이해, 청각장애인의 이해, 수화통역의 기초 총 4과목이다. 전 과목 평균 60점 이상, 각 과목당 40점 이상을 받아야 합격할 수 있는 시험, 다행히 모두 객관식 4지선다형이라 1과목당 25문항씩, 총 100문제만 풀면 됐다.
1교시는 장애인복지와 한국어의 이해, 2교시는 청각장애인의 이해와 수화통역의 기초를 각 80분간 본다. 감독관은 농인, 청인 한 분씩 배정되었고, 시험 안내는 한국어와 수어로 동시에 진행되었다. 전자기기 소지 금지, 조기 퇴실 불가 등 시험 규정을 듣고 이내 시험지가 주어졌다. 두근두근... 과연 시험은 어떻게 됐을까?
처음 공부하는 영역도 있어 준비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배우는 내용 자체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청각장애인의 이해는 공부한 경험이 있어 괜찮았지만, 장애인복지와 수화통역의 기초는 처음 접하는 분야라 신선했다. 가장 어려웠던 건 한국어의 이해였다. 한국 사람인데 왜 한국어의 이해가 제일 어려울까.... 정말 아이러니다.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해방감과 함께 묘한 찝찝함이 몰려왔다. 다른 과목은 괜찮은데 한국어의 이해가 60점을 넘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젠장. 그래도 끝났으니 일단은 잊지로 했다. 나에겐 아주 중요한 다음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이 끝나고, 하개월 유튜브 자막 지원을 했던 분들과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 우리는 시험장 앞에서 만나 약속 장소인 카레집으로 향했다. 시험을 잊고 싶었지만 가는 길 내내 시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해부터 시험 유형이 바뀐다고 했는데 작년보다 쉬워진 모양이었다.
카레집에 들어가니 하개월님이 먼저 와계셨다. 유튜브에서만 보던 분을 직접 만나니 연예인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어를 어느 정도 하는 사람이라면 하개월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자연스럽게 수어로 대화를 했다. 하하. 난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수어로 대화하는 자리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음식이 나오자 더 난감해졌다.
'수어를 하려면 손을 써야 하고, 눈은 상대를 봐야 하는데 그럼 언제 먹어야 하지?'
속으로 고민하는 사이, 나머지 셋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먹고 있었다. 나는 카레 한 숟가락을 들고 멈춰 있었지만, 다른 분들은 손짓과 표정을 주고받으며 능숙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한 분은 농인이고, 한 분은 수어통역사였고, 또 다른 한 분은 농인과 함께 근무하는 분이어서 모두 수어로 대화하는 게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하하. 당황스럽지만 이 상황이 재밌기도 했다. 두 분은 나를 배려해 말과 수어를 동시에 사용해 주셨는데, 수어와 한국어의 어순이 다르다는 걸 알기에 그들이 더욱 대단해 보였다. 통역을 해주시긴 했지만 눈은 계속 그들의 손과 얼굴에 있었다. 그 말은 즉 거의 먹지 못했다는 뜻이다. 정말 너무 생경한 경험이었다. 수어의 세계가 더욱 궁금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로 향했다. 이번에는 식사 때보다 나았다. 음료는 빨대로 마시면 되니 손과 눈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몇 시간 동안 수어에 몰입하다 보니 눈이 조금은 적응한 기분이었다. 더듬더듬 내 생각을 표현하기도 하고, 가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게 4시간가량 함께하며 시험, 자막 작업, 일상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치 수어의 세상 속에 살다 나온 기분이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수어에 관심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9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시험을 준비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시험을 보지 않더라도 수어를 배우는 사람들, 이미 수어통역사 시험을 합격한 사람들까지 생각하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수어를 알고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두 달 동안 필기시험 대비반 수업을 듣고 한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한 결과,
두구두구두구...
합격이다!
나는 이제 수어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