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먹고살려고 하는 거지”라는 말이 있다. 삶이 고단할 때마다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먹고산다’는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도 있다. 바로 ‘밥술’이라는 단어다. 밥술은 본래 ‘밥을 먹는 데 쓰는 숟가락’을 뜻하나 살림을 이루는 정도를 판단한다. “밥술깨나 먹는다.”, “밥술을 쥐고 산다.”, “밥술이나 뜬다.”라는 표현을 곱씹으면 그렇다. 생계에는 음식을 먹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래서 매일 “오늘은 뭐 먹지?”를 고민한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직장인이었을 때 컵라면으로 끼니를 대충 때웠다. 음식은 배를 채우기만 하면 되는 수단이었다. 아무래도 건강에 무심하고 음식보다 일이 우선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 먹고살려고 하는 일에서 건강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는 생계가 흔들리면 안 되었다. 그렇게 말레이시아를 떠났다. 한국에서 매달 피를 뽑고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으며 건강을 회복해 갔다. 말라카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혼자가 아닌 둘이 살림을 이어가니 투박하더라도 건강한 밥상을 차리기로.
매끼를 사 먹는 문화인 말레이시아 특성상 주방이 협소하다. 가정집이 아닌 이상 인덕션이나 가스레인지가 설치된 주방을 만나기가 어렵다. 신혼집은 협소한 주방에 인덕션이나 가스레인지가 없다. 그래도 요리해야 하니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구입했다. 밥솥과 냄비 여러 개를 구비했다. (전자레인지는 아직도 없다는 게 함정이다) 남편의 외벌이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요일마다 장을 보았다. 주부로서 한 걸음, 두 걸음을 떼며 음식을 대접할 준비를 마쳤다.
한 입에서 두 입이 되니 달라진 게 하나가 있다. “오늘은 뭐 먹지?”에서 “오늘은 뭘 먹이지?”로 질문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신혼생활의 로망을 이루고 싶었다. “오늘은 뭘 먹이지? 계란말이와 어묵볶음에 스팸김치찌개를 해야겠다!” 하며 식단을 짰다. 식단표는 대부분 한식이었다. 한식을 사랑하는 라이언 덕분이었다. 소꿉놀이하듯 가스레인지 하나로 여러 반찬과 국이나 찌개, 고슬고슬 갓 지은 밥을 준비했다. 그러나 소꿉놀이는 한 달이 채 가지 않았다. 땀에 절어 삼첩반상을 차리다 보니 입맛이 없어졌다. “요리하고 나면 입맛이 없어”라고 종종 말씀하시던 엄마가 생각났다. 저녁 식사에서 젓가락을 깨작깨작하는 모습에 남편이 말했다. “네 건강이 우선이야. 음식 하나로도 행복하니 아무거나 해줘. 맛있는 요리를 해 줘서 늘 고마워.”
음식 투정을 하지 않는 남편을 둔 것이 복이라면 복일까? 내가 해주는 요리마다 엄지를 치켜드는 남편. 그날 이후부터 밥상 다리는 휘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은 뭘 먹이지?’라고 생각하는 건 똑같다. 주말마다 머리를 쥐어짜며 주간 식단표를 메모장에 작성한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날마다 저녁을 다르게 차리고 싶다. 아무리 간단한 요리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성을 들여 한 끼 식사를 식탁에 놓고 싶은 욕심이겠다. 된장찌개, 떡볶이를 포함한 한식부터 야매 스키야키인 일식, 단백질을 추가한 샐러드까지 요리의 스펙트럼도 넓어지고 있다. 생물의 촉감을 상상만 해도 오돌토돌하게 닭살이 온몸에 일었지만, 이제는 생고기를 숭덩숭덩 써는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
요리하다가 문득 엄마를 떠올린다. ‘우리 엄마는 어떻게 지난 40년간 가족을 위해 한결같이 식사를 준비하셨을까?’ 하는 질문과 함께. 아마도 당신의 무한한 사랑이 답일 것이다. 매일 메뉴를 바꿔가며 건강한 밥상을 차리시는 우리 엄마를 닮을 수 있을까? 그래도 사랑하는 이에게 요리해 주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