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끝자락이 다가올 때마다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첫눈으로 도배된 뉴스를 시청하며 겨울의 기억을 하나둘씩 꺼낸다. 어스름한 새벽에 일어나 소복이 쌓인 눈길을 저벅저벅 걸었던 기억. 창백한 목에 버건디색 머플러를 꽁꽁 두르며 매서운 칼바람과 맞서던 기억. 새하얀 눈송이가 흩날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따뜻한 카페모카를 마시던 기억. 반려견 하루와 밤 산책을 하며 서로의 발자국을 남겼던 기억. 크리스마스 날 테디베어 담요를 덮고 귤껍질을 까며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를 정주행하던 기억. 겨울은 설렘의 불씨를 지피는, 일 년 중 가장 로맨틱한 계절이다.
이토록 겨울을 사랑하는 새댁이 여름 나라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말레이시아인 남편과 함께하기 위해서다. 여름 하면 절은 땀에 피를 쪽쪽 빨아먹는 모기, 밤새 울어대는 매미로 잠을 못 이루는 나날이 떠오른다. 무더위를 피하고자 들어온 실내는 에어컨으로 빵빵해 코를 훌쩍이게 한다. 자연의 더위와 인공의 추위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비염인은 고통받는다. 여름에 태어났지만, 여름 나라와 맞지 않는다. 쿠알라룸푸르는 후덥지근해도 살면서 숨이 턱 막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말라카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 쿠알라룸푸르보다 훨씬 덥다. 낮에는 작열하는 햇빛으로 밖을 돌아다니기 힘든데, 밤에도 더위가 한풀 꺾이지 않아 새벽 4시마다 잠에서 깬다. 무더워서 잠을 설치니 우울감이 몰려온다. “우중충한 날씨로 사람이 우울해진다.”라는 말은 익히 들었는데, 살다 살다 더워서 울적해지는 것은 처음이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직장 생활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퇴근하고 친구들을 만나 마음껏 수다를 떠는 것이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전사하여 직장인의 삶에서 벗어났다. 말라카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면서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남편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터놓을 친구 하나 없이 남편의 퇴근 시간만 바라보며 살림하는 나날이 늘어났다. 일을 하고 싶어도 지역 특성상 외국인을 필요로 하는 직장은 보이지 않았다. 외롭다. 아니, 고독하다. 말라카에서 지낼수록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머릿속으로 되뇌며 남모를 속앓이를 한다.
라이언의 외벌이로 신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가 시아버지 밑에서 일하다 보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집안일을 대신해서 해야 할 때가 생각보다 자주 있다. 가끔은 너무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나칠 때가 있어 이것이 부부싸움으로 번진다. 그렇다고 남편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것뿐이다. 장남의 역할을 해야 하고, 가장의 역할도 해야 하기에 라이언의 어깨가 무겁다. 무엇보다 뜻하지 않게 연이은 굵직한 경조사로 그의 부담이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남편이 내색하지 않아도 가정을 지키려는 그의 노고에 늘 고마워하고 있다.
아직은 새내기 부부라서 결혼 생활을 조언할 깜냥이 되지 못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마음가짐이 결혼을 향한 자세인 듯하다. 특히나 국제 커플에게 이 같은 태도가 더더욱 필요하다. 배우자의 나라가 정서에 맞지 않더라도 현실적인 이유로 그 나라에 있는 것이니 감내해야 한다. 문화 차이로 인한 오해를 풀 때 이해를 요구하기보다는 상대방이 스스로 그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시간을 들여 기다려야 한다. 중요한 건 이것들을 흔쾌히 해야 한다. 그리고 배우자의 희생을 당연시하지 말아야 한다.
‘아, 이래서 결혼은 현실이구나!’
마냥 꽃길만 걷지 않는 게 결혼 생활이라는 걸 뼈저리게 배우고 있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모든 순간을 함께 극복해 나가며 남편을 토닥이는 성숙한 아내가 되고 싶다. 오늘도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을 되새기며 서로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