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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녜 Sep 09. 2022

코코넛

말레이시아는 코코넛이어라!

'코코넛' 하면 우리나라에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코코팜'이 떠오른다. 코코팜은 상큼한 포도 향에 쫄깃한 코코넛 맛의 젤리가 들어 있어 햇병아리 시절에 자주 마시던 음료수다. 코코팜은 어린 나에게 달콤한 인생을 선사해준 추억의 마실 거리였다. 코코팜 속 코코넛 맛의 젤리는 새하얀 모래와 새파란 하늘에 야자수 나무 양옆으로 묶인 해먹에 누워 휴양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었다. 이때 당시에만 해도 코코넛이 대롱대롱 매달린 팜나무가 끝도 없이 펼치는 여름나라에서 살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다 큰 성인이 된 지금은 말레이시아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팜 오일 수출국인 말레이시아에서 코코넛이 함유된 음식을 접하는 것은 흔하다. 코코넛 아이스크림, 코코넛 밀크셰이크, 코코넛 커피, 그리고 카야 잼(Kaya Jam)까지 코코넛으로 만드는 디저트는 설탕 한 스푼으로 말레이시아 생활을 달곰하게 영위해준다. 말레이시아에서 코코넛은 디저트 말고도 다른 요리에도 활용된다. 가령 코코넛 밀크로 지은 밥에 맵싸한 삼발(Sambal) 소스가 더해진 나시르막(Nasi Lemak)과 코코넛 밀크로 식감이 부드러운 각양각색의 커리 요리가 있겠다. 말레이시아인이 사랑하는 현지 음식에는 코코넛이 빠질 수가 없는데, 애석하게도 내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삶은 코코넛처럼 극과 극의 매력을 지닌다. 온화하고 맑은 하늘에 몽글몽글 덩이진 구름. 다양한 종류의 싱싱하고 값싼 열대과일. 콘도 내 무료 수영장과 피트니스 센터. 나무늘보처럼 느긋하고 여유로운 슬로 라이프. 칼퇴가 당연시되는 직장생활. 말레이시아라서 기꺼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느리다 못해 무책임해서 화병이 나는 구닥다리 행정 처리, 365일 후덥지근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 밖에서 걷다가 허탈하게 중간에 끊어지는 인도, 뚜렷한 계절의 변화가 없어 시간이 멈춘듯한 단조로운 일상은 당장에라도 짐을 싸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레이시아를 떠나고 싶게 한다.


  이 여름 나라에서 양가적인 감정에 휩쓸리며 용케도 살아남은 나 자신이 놀랍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인연. 이전 회사에서 걸려본 공황 발작. 한 사람의 밑바닥을 마주한 순간.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이직의 기회. 새로운 직장에서 겪는 건설적인 성장통. 그리고 때늦은 방황. 말레이시아에서 체득해온 작은 것들은 반짝이는 별이 되어 밤하늘의 드넓은 은하수로 나를 감싼다.


  말레이시아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던 전 직장 동료들과 종종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의 입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문장은 "말레이시아가 늘 그립다."다.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조금씩 깨우치고 있다. 보행길이 자주 끊어져 산책하는 것이 곤욕스러워도, 널린 게 공사판이라서 먼지가 집안 곳곳으로 침투하더라도, 미련하고 답답한 정부 지침에 혀를 내둘러도, 말레이시아에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욱 많기에 이곳에서의 일상이 점점 좋아진다. 말레이시아에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다. 바로 여유, 인연, 그리고 용기겠다.


  코코넛은 애증의 열매다. 어느 음식으로 탈바꿈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 코코넛이다. 코코넛 밀크가 들어간 밥은 싫지만, 코코넛 밀크셰이크는 없어서 못 마신다.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다. 끝없는 지평선의 평화를 선물하지만, 따분하기 짝이 없는 건조한 나날의 연속 또한 경험하게 해주는 나라가 바로 이곳, 말레이시아다. 이곳에서 생을 영위하며 나만의 말레이시아 생활을 개척하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여정을 계속해서 글로 담아내고 싶다. 모든 이에게 공감을 바라지 않더라도 누구 한 사람이 나의 에세이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지금처럼 말레이시아 생활을 풀어갈 의무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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