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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불행?

서로 대척점에 서있으면 '절.대.로!' 안 되는 두 가지 것의 만남

by kolumnlist

언젠가, 불행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행복이란 단어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불행은 이상하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무언가였거든요. 문제는 단어였어요.

자, 이제부터 불행이란 단어를 찬찬히 뜯어볼까요? 불행은 아닐 불(不)에 다행 행(幸)자. 다행은 또 무엇이냐? 많을 다(多)에 다행 행(幸)이에요. 많은 행(幸)이 행(幸)이란 뜻이죠. 이처럼 오묘한 뜻을 지닌 행(幸) 앞에 불(不)이 붙어요. 행(幸)하지 아니한 상태. 행(幸)이 불(不)한 상태.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단순히 행(幸)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에요. 우리가 불행이란 단어의 뜻을 불행보다 더 큰 의미로 써왔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에이-. 원뜻이 그렇다곤 하지만, 지금은 완전 다른 의미로 쓰고 있잖아! 가관(可觀)처럼!”

아, 맞아요. 원래 가관은 썩 보기 좋은 걸 뜻하는 단어였죠. 하지만, 지금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것처럼요. 근데 불행은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요. 잘 들어봐요.

내 주머니에 천 원이 있어요. 그걸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어요. 그렇다면, 천 원은 내게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진 거죠? 천원이 행복이라고 했을 때, 천원이 사라진 상태는 불행하다라고 표현하죠. 단순히 내게 필요한 게 있다가 없어졌을 뿐인데, 불행하다고 하죠. 사실은 있다가 없으니까 불편하다의 뉘앙스 정도의 가벼움이어야 하는데, 불행하다는 그보다 무겁잖아요! 단순히 있다 없어졌을 뿐인데, 그걸 비극적인 깊이까지 가잖아요. 그럼 우리 뇌는 이렇게 생각해요. ‘아, 행복하지 않으니 불행한 거구나. 이거, 참.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걸?’ 행복하다가 안 행복하면 그냥 안 행복한 상태인 거지, 그게 불행한 상태는 아닌데. 우리는 불행을 너무 심각한 깊이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이 단어 불행하다를 단순히 행하지 않은 게 아닌 비참한 수준으로 보니, 우리는 항상 행복한 상황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있잖아요. 어떻게 사람이 늘 행복한 일만 있을 수 있는 거죠? 가끔은 그저 아무 느낌 없이 지나갈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너무 슬픈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어요. 자연이 날씨로 선물한 슬픔이든, 인간이 내게 준 슬픔이든, 뭐든 간에요. 근데 우리는 ‘불행’을 잘못 받아들여서, 불행하지 않은 순간들을 만드려고 해요. 그저 행복하지 않은 날이었던 평온한 날마저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래서 우리는 늘 행복의 정의를 내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요.

[공부 열심히 해야 돼.]

[꿈은 버려야 돼.]

아, 이거는 왜 그러냐고요? 꿈을 꾸는 사람들은 남들이 봤을 때 불행할 것 같은 순간들이 많거든요.

[좋은 대학 가야 돼.]

[월 몇 백은 벌어야 돼.]

[결혼은 이런 여자(남자)랑 해야 돼.]

[네 성공을 위해 이만큼의 집중을 해야 돼.]

동기부여 영상들, 자기 성공적인 것들 다 마찬가지예요.

근데, 우리는 역설적으로 불행하지 않기 위해 행복을 놓쳐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을 때 얻었던 것들. 좋은 대학을 포기하고 얻었던 인생의 경험들. 조건 없이 결혼한 삶의 행복. 성공 대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쫓았던 사람들의 모습. 수많은 증거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외면하며 그저 ‘운 좋게 태어난 놈.’ ‘축복받은 놈.’ ‘전생에 나라를 구한 놈.’ 심지어 ‘이순신 장군 조타수였던 놈.’이나 ‘전생에 독립운동한 놈.’이란 칭호까지 붙여줍니다. 아니면 진심 섞인 농담으로 ‘제발 거기 3cm…….’라는 비극적인 칭호까지 달아주고요.

저는 과거 대학에 졸업한 후, 그저 그런 백수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제발, 말도 안 되는 일 말고, 지금 전공한 일로 직업을 구하자.’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전공이 작곡이었거든요. 아무 쓸모없는 작곡과 졸업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작곡가밖에 더 있겠어요? ‘작곡과 졸업했으니, 저희 XX하이닉스 반도체 공정 전문가로 채용하겠습니다.’ 안 합니다. 물론 그 외의 어떤 일도요. 작곡을 전공했으니 작곡을 해야죠. 작곡이 쓰이는 일 중에요. 그래서 작곡가가 되게만 해달라고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소개로 인해 한 소속사에 작곡 파트로 입사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 일로 먹고 살게 해달라고 했는데. 근데, 입사하니까 또 목표가 생기지 뭡니까? ‘내 노래가 앨범에 실렸으면 좋겠다.’ 열심히 곡을 씁니다. 그렇게 곡이 나오면 또 뭡니까? ‘내 앨범이 차트인 했으면 좋겠다.’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물론 전 차트인은 해본 적 없이 일을 그만뒀지만, 아마, 차트인을 했으면 더 큰 목표가 생겼을 겁니다. 행복을 위한 목표요.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행이란 목표를 쟁취하지 못했으니 불행이죠).

이렇게 행을 찾음과 동시에 또 다른 목표 행이 생겨버려 불행한 상태가 지속되는 거죠. 찌는 태양 아래서 오아시스를 향해 2시간을 뛰었는데. 겨우 도착한 오아시스에는 생수 500ML만큼의 물밖에 없는 겁니다. 생수를 다 마시니 목이 조금은 촉촉해졌습니다. 근데, 이 갈증을 이겨내고 싶어서 또 다른 오아시스를 찾습니다. 진짜 목말랐거든요. 또 다른 오아시스를 향해 또 열심히 달립니다. 이번엔 1L짜리 생수만 있는 오아시스가 있네요? 그렇게, 계속해서 행복을 찾아갑니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언젠가 찾을 200L(마치 비트코인으로 500,000% 수익률을 남긴 인간들 같은 거대한 행[幸])짜리 오아시스를 위해서.

참, 나. 그렇게 행복을 찾아 돌아다녔는데 남는 건 또 다른 기대감과 불행이라니. 근데 여러분. 우리 앞서서 봤죠? 불행한 게 꼭 비참한 건 아니라고. 근데, 우리는 불행하다를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거죠. 그렇기에 어렸을 땐 학업, 커서는 직장, 더 커서는 결혼, 더 커서는 자녀 계획, 더 커서는 노년 계획까지. 더 큰 행복을 위해 살아가요. 그때에만 누릴 수 있는 경험들을 포기하고요.

물론 만족한다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만족하는 사람이 어딨을까요? 제 주변에 주식 고수 형님은, 주식이 내가 목표한 그 지점까지만 올라가면 바로 팔아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묻습니다, ‘그 주식이 더 오르면 배 아프잖아요.’ 그랬더니 형님이 그러덥니다. ‘그건 내 상관 아니잖아?’. 그때 느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식할 거 아니면 그냥 손도 대지 말아야겠다.’ 저는 항상 잃어왔었거든요, 주식할 때. 오르면 ‘더 오르겠지?’하고 내버려두고, 떨어지면 ‘언젠간 오르겠지?’하고 그냥 내버려두고. 좋은 가격에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오르면 ‘이게 뭐야?’하고 배 아파하고. 완벽하게 만족하는 건 진짜 쉽지 않아요.

만족을 못 하는 인간이 계속 행복만 좇다 보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가졌던 행복을 그냥 지나치고 다음 목표로 가게끔 만들어요. 안 그러면 도태될 거 같거든요. 근데, 사실 도태 안 되는 거 알잖아요. 그냥 다들 살아가잖아요. 그들이 ‘불행할 거야.’라고 믿어버린 다음, 진짜 불행하면 ‘거 봐, 내 말이 맞지?’라고 하거나, ‘저건 예외야. 왜냐면 쟤는 원래 돈이 많고, 집안이 좋고, 끼리끼리 만난 거고.’하잖아요. 저렇게 따지는 사람은 좀 나아요. 근데 어떤 사람들은 이래요. ‘저런 건 남편(부인)이 전생에 이순신 조타수여서 그래.’라고 해요. 이제는 그냥 환상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버리는 거죠. 아니면 망할 때까-지 지켜보잖아요. ‘어머, 저 놈들 왜 아직도 안 불행한 거야? 빨리 불행해야 할 텐데!’ 우리가 악플에 좀 더 민감한 이유는, 자기 삶의 믿음이 깨지지 않기 위한 발악이 너무 많아서이지 않을까요. 망하지 않으면 내 믿음이 부정당하는 거 같고, 그게 부정당하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불행’이 되어버리니까요. 내가 불행하지 않기 위해 남이 불행하기를 비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불행이란 단어가 너무 커져서, 그 커진 만큼을 두려워하게 된 거예요. 우리 귀엽고 어여쁜 골든 리트리버가, 갑자기 건물만큼 거대해진 거예요. 처음엔 귀엽죠. ‘어머, 골든 리트리버가 거대해 졌어!’ 근데, 갑자기 리트리버가 뛰다가 나를 밟으면? 나는 죽잖아요, 그 자리에서. 그러다보니까, 거대해진 리트리버를 두려워하게 된 거예요. 사실은 작았을 땐 너무 귀여운 녀석인데.

불행의 의미가 너무 커져버려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에 살아가는데. 사실 행복하지 않은 날도 좋은 날이 될 수 있잖아요. 그냥 조용하게 지나간 하루가 있을 수도 있고. 조용하지 않게 지나간 하루가 있을 수도 있고. 오늘은 좀 행복하지 않았던 날일 수도 있고.

그걸 딱 깨닫고 나니까, ‘아아-! 세상에,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니, 불행하다고 해서 딱히 비참한 건 아니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결론에 도달했거든요? 근데 이제 웃긴 게, ‘그럼 나는 행복하지 않은 날도 그럭저럭 보낼 수 있는 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불행해도 괜찮은 몸 상태를 위해 8시간은 자야 돼요. 운동도 1시간씩 해야 되고요.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해야 돼요. 일은 적당히. 이러면 불행한 날도 괜찮아요.

“에이, 아저씨! 그게 행복한 거예요. 그걸 다 할 수 있는 게 행복한 거라고요.”

아니죠. 행복한 건 이것보다 더 행복한 게 행복한 거죠. 그리고 제가 아까 말했잖아요. 불행해도 괜찮다니까요? 행복한 건 그냥 1년에 1번 찾아올까 말까 하는 손님 같은 거고, 불행한 건 일상적인 거예요. 그저 안 행복한 것일 뿐이니까요.

“그래요. 그게 행복한 거라고요. 그게 행복이에요.”

그래요? 그럼 당신도 행복하기 위해서 이렇게 사는 게 어때요? 물질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내가 최소한 불행해도 괜찮을 게 뭔지 생각해 보는 거예요. 단, 너무 많은 건 불행의 역치를 점점 높이는 거예요. 최소한 2, 3가지의 것들로만 채워야 해요.

“다 채웠는데, 일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요? 일은 왜 하는데요?

“불행하지 않으려고요. 행복하려고요.”

아까 말했죠? 불행은 그렇게 비참한 게 아니라고. 불행해도 돼요. 그저 행복하지 않은 것뿐이에요.

혹시 너무 큰 행복을 바라면서, 아니면 불행이 두려워서 불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건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도달한 거죠. 내 스스로에게. 불행과 행복.

여기까지 생각이 드니까, ‘그렇다면 행복이란 건 뭔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씨. 머리 아프긴 한데, 그냥 좋은 거예요. 너무 좋은 거. 미치도록 좋아서 매일 먹고 싶은 거. 만일, 먹으면 행복한 라면이 출시된다면, 가격이 1억으로 뛸지도 몰라요.

“에이, 설마요…….”

봐봐요. 똑같은 집인데 서울 어디에 있는 집은 몇십억하고, 왜 저 시골에 있는 집은 몇천만 원이면 살 수 있을까요? 그 주변엔 행복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거든요. 불행하지 않을 것들이 너무 많거든요. 불행할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거든요.

어쨌든.

불행하지 않아도 괜찮으면, 사실 괜찮지 않아요? 나는 괜찮을 수 있을 거라고 봐요. 매일 먹고 싶지만, 매일 먹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이걸 먹지 않는 날도 행복한 거라고 생각하면 행복한 거라고.

내가 불행해도 괜찮을 만큼의 월급을 주는 회사와(아까 말했듯이 내가 행복할 만큼의 금액이 아니에요. 불행해도 괜찮을 최소 단위에요. 그리고, 남들 말 듣지 마세요. ‘적어도 이정도는 되어야돼.’가 아니에요. 난 6개월에 한 번씩 한정판 옷을 사야 돼, 해외를 나가야 돼, 호캉스를 즐겨야 돼. 이건 없어도 되는 거잖아요. 생존을 위한 것들 말이에요. ‘삼시 세끼는 먹어야 돼.’ ‘내 정신 건강을 위해 이 주변에 공원은 있어야 돼.’ ‘잠은 이 정도는 자야 돼.’ ‘최소한의 것들로만 채우면 이 정도면 돼.’라는 걸 세우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그렇게 차곡차곡 살면 되잖아요. 그러다 뻥 쌓이면 가끔 터트려주고. 이건 그저 제 삶의 방식이에요. 제 행복은 이런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은 또 다른 게 될 수 있겠죠. 저보다 행복의 역치가 높은 분들은 더 큰 행복을 원할 수도 있고요.

어쨌든.

이쯤 되니 어디까지 갔냐면, ‘행복의 역치를 낮추면 반대로 불행의 역치는 올라가니까 행복을 최저치로 낮춰볼까?’라는 생각까지 갔어요.

행복의 역치를 엄청 낮추니까, 불행의 역치가 높아져서, ‘나는 월 100만 원만 벌어도 행복하겠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안 믿기시죠? 저도 가끔은 남들이 ‘그럼 힘들지 않아?’라고 할 때마다 조금 흔들려요. 근데, 막상 지금 삶이 그러니까, 괜찮더라고요. 조금 불행할 뿐이지, 그게 비참하거나 최악의 상황은 아닌 거예요.

근데, 행복의 역치가 높으신 분들은 비교적 불행의 역치가 낮죠. 그런 사람이 절 보면 “미친, 그거 다 자위하는 거야. 혼자만 행복하면 뭐하니?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불행(비참)한 거는 진짜 불행(비참)한 거야.”라고 말해요.

그럼 저는 그냥 말해요. “그래. 불행(안 행복함)한 거 뿐이야. 그거 괜찮아.”

그럼 상대방은 또 말해요. “그래. 불행(비참)한데 괜찮아? 그렇게 불행한(비극적) 삶은 싫어.”

그럼 저는 또 이렇게 생각해요. ‘어? 그게 또 그렇게 되나?’

왜냐면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하면 흔들리거든요. 너무 쉽게.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은 그래서 고지식하고 독불장군적인 면이 있나봐요. 나는 너무 행복한데 주변에서 뭐라고 해. 그러면 짜증이 쌓이거나, 현혹되어서 현실을 보거나, 그냥 무시하거나죠.

그러면 이제 “야, 저거 봐라. 저러다가 큰 코 다치지. 다 불행해 질 거야.”라고 합니다.

이 말을 현대 언어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저렇게 결혼하잖아? 십중팔구 다 이혼해. 애 있으면 마지못해 사는 거야, 불행하게.”

“야, 저런 직업 가지고 살아가잖아? 삶이 불행해.”

“야, 너 저런 대학교 나오잖아? 존나 불행해지는 거야.”

“너 저런 사람 되잖아? 인생 좆되는 거야.”

더 있을 걸요? 저는 사실 주변에 다 착한 놈들뿐인지 이런 말 잘 안 하거든요. 아, 애초에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이랑 연을 끊었어요. 아, 이 글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야, 저거 봐. 저 새끼 저거 끝까지 이 악물고 무시하는 거 봐.’ ‘저런 게 통속의 뇌야.’ ‘쟤는 나중에 다 후회한다.’

그런 말 안 들으려고 다 끊은 거예요. 저는 그런 말들만 없으면 불행(안 행복)할 뿐, 비참한 건 아니거든요. 남들이 비참하다고 가스라이팅하면 진짜 비참해져잉-!

쥐뿔 없이 결혼해도 괜춘. 그냥 살아도 괜춘. 직장 구려도 괜춘. 지금 그저 불행하면 괜춘. 가끔 행복하면 아주 좋고 괜춘.

괜찮으면 뭐 괜찮잖아요? 근데, 옆에 다른 누군가가 ‘괜찮으면 뭐 괜찮잖아요?’라고 해요. 그럼 그 사람이랑 사랑에 빠져서 ‘괜찮으니까 정말 괜찮네?’라면서 살아요. 그럼 괜찮죠?

“야, 그것도 돈 있어야 되는 거야. 돈 없어봐라.”

돈 없어도 그런 말 없으면 괜찮아요. 나랑 이 사람이 괜찮다는데 남들이 왜 감놔라 배놔라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그래요. 유교 사상이 심해서 꼰대들이 많아요. 당장 나만해도 꼰대예요. 완전 개꼰대예요. 이게, 괜찮다는 걸 아는데도, 주변의 망령(머릿속에 남아있는 아픈 기억)들이 계속 날 괴롭혀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가끔 그들의 언어가 나와요. 저도 모르게 불쑥. 근데, 그것도 다 괜찮아요. 이거 고쳐나가면 돼요. 언젠가 꼰대가 안 되었을 때, 네 삶도 괜찮고, 내 삶도 괜찮다고 느낄 때가 되면 저도 안 행복해도 괜찮은 사람이 될 거 같아요.

그냥 괜찮게 사는 삶이 뭘까 잘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불행해도 괜찮은 게 뭘까.

저는 그 괜찮은 게 뭘까를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를 보면서 많이 느꼈어요.

‘아, 무언가를 해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무엇을 하든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불행의 역치를 계속해서 높이니까 이제는 어떤 생각이 드냐면, ‘죽으면 다 끝나네? 이거 내 한 몸 뒤지면 그냥 이승 로그아웃이네?’ 사후세계가 만약 있으면 다행인데, 사후세계가 없어 봐요. 최악의 가정까지 가보잔 거예요. 최악의 가정으로 사후세계가 없다면, 우리는 그냥 끝나는 거예요. 근데, 죽으면 다 끝나는데. 갑자기 내일 아침에 또 살아갈 수 있다면? 당장 내일 하루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우리 오늘 하루가 아쉽거나 만족스럽지 못하면, 밤에 핸드폰 본다고 하잖아요. 핸드폰 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오늘 하루가 불만족스러운 거예요. 그게 다 ‘아쉬워서’ 그런 거잖아요. 우리 아쉬워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감사해하며 충분하게 살아봐요. ‘노력해라’가 아니라, 그냥 오늘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자. 미친 듯이 열광하며 목표를 향해 짐승처럼 달려가는 게 아니라, 그냥 오늘 하루의 삶을 살아가자. 하루하루는 오늘 내가 ‘가능한’ 최선을 다하고, 먼 미래 계획은 그저 설렁설렁, ‘잘 되겠지. 뭐.’하면서 살아보자. 가능한한 최선. 남들이 ‘이 정도는 최선을 다해야 된다.’라고 정해놓은 게 아니라, 내가 ‘내 스스로의 오늘의 한계는 이 정도야. 만족스러워.’할 만큼. 이걸 못 채워서 불안해서 잠 못 자는 정도가 아닐 정도. 그렇게 그냥 살아보자.

그렇게 살면, 그냥 오늘 내가 숨 쉬는 게 행복해질 걸요? 대신, 주변에 ‘야, 너 그렇게 살면 도태되는 거야.’라는 친구만 두지 마세요. 남들이 ‘도태 모임’이라고 부르는 곳에 다같이 모여서, 우리만의 행복감을 나누며 단단해져 봐요. 우리끼리 단단해지고 다들 헤어져요. 남들이 뭐라해도 ‘어딘 가엔 우리처럼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어.’라고 믿고 살아가요. 외롭지 않다고. 우린 저들의 말처럼 바보가 아니라고. 우리만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고.

‘너 바보지?’

‘허허허-. 그럴 수도 있고.’

‘우이씨-. 너 진짜 바보지!’

‘허허허-. 그냥 별일 없이 살어.’

‘이씨, 너는 일이 있어야 된다니까!’

‘아니. 별일 없어. 너는 많이 힘드니?’

‘…….’

결국, 화 내는 사람은 누군지 봐보세요. 우리가 이렇게 살면, 우리는 행복한 거예요. 그리고, 그 힘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줘요.

‘행복해지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던데. 너도 같이 해볼래? 내가 도와줄게.’

실례로, 어떤 일에 몰입할 때,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낀대요. 그게 화장실 청소여도, 그 일에 몰두하고 있다면 행복하다고 느낀대요, 뇌가. 아, 진짜로요.

매일 아침 하늘을 바라보며, 환희의 미소를 짓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처럼.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삶의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처럼.

뭐라고요? 저쪽으로 마이크 좀 주세요. 저분이 뭐라고 하는 거 같거든요?

마이크 받으신 분! 말씀하세요.

“아-. 아-. 야, 이 병신아. 그딴 개소리 씨발 누가 믿어, 새끼야. 이 사기꾼 병신 새끼. 너 그럼, 앞으로 몸 고된 일 하면서 평생 좆밥취급 당하면서 살아봐라. 다 정신 자위고 다 병신들이야. 도태된 인간들의 좆밥 토론이고, 자기 위안이야. 저런 거 믿어? 병신이나 믿지. 에휴……. 니 인생 그렇게 살면 니 아들내미가 니 존나 원망해, 병신아. 니네 부모는 무슨 죄냐? 효도 안 하냐? 시팔 니 인생 존나 망한 거야. 진짜 내 말 봐라. 10년 지나면 너 나한테 그럴 걸? ‘아 네 말이 맞네. 진짜 그렇더라.’하면서 질질 짤걸, 병신아? 내가 1,000만 원 건다. 씨발 애새끼도 아니고 왜 몽상 속에서 사냐? 존나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당장 씨발……. 아휴, 말해서 뭐하냐. 너 그 형 알지? 왜 음악한다고 존나 깝치던 형. 그 형 결국에 뭐하는지 알아? 물류센터 가서 일해. 씨발 그러면서도 존나 좋-다고 헤벌레-. 음악 해서 좋다고-. 병신마냥. 그런 삶 살래? 멍청한 새끼. 아, 뭐, TV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 보면서 자위하는 거야? 이래서 씨발 TV가 인간들을 다 망친다니까. 씨발 그런 사람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분’들이야. 일반인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거야. 아니면 집에 돈이 존나 많아서 돈 걱정 없거나. 뭐? 돈 많이 안 벌어도 된다고? 네가 행복하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야. 주변에서 너 병신으로 보면 병신인 거야. 이 새끼 진짜……. 야, 네 인생 네가 알아서 살어. 조언을 해줘도 듣는 시늉을 안 하네, 이 새끼가. 확 패버리고 싶게. 너 옛날 같았으면 줘 맞았어, 형들한테. 때려서라도 정신 차리게, 병신아. 너 같은 새끼들 예전에 존나 많았는데, 내가 다 정신 차리게 만들었어. 내가 너같은 새끼들 존나 많이 갱생시켰다고. 나처럼 그 꿈 버리고, 이쪽으로 와. 현실로 오라고, 새끼야!”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지금 괜찮아요.

“어휴……. 모지란 새끼.”

네, 알겠습니다. 그쪽도 쭉 행복하시길 바랄게요!(가관[可觀] 마냥 비꼬는 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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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불행한 게 아니라 행복하지 않을 뿐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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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