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색과 기억의 상자
2024년 아트러너 55명이 선정되었다.
4월부터 기초교육을 시작으로, 실전교육, 현장실습을 거쳐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다.
* 4월 4일(목) 11:00~17:30
오리엔테이션과 기초교육 1차(공공성), 2차(용인이야기)
* 4월 11일(목) 10:00~16:30
기초교육 3차(아트러너는?), 4차(어떻게 만날까요?)
기초교육은 문화, 예술, 공공성 등 어려운 주제를 다뤘지만,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편안하고, 친근한 이야기로 진행되었다. 맨 앞줄에 앉아 강사의 표정, 몸짓 하나까지 집중하며 강의를 들었다. 교육이 끝날 즘엔 아트러너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생겼다.
작년에는 팀을 나누어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올해는 그 과정 없이 전문기획팀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한다. 본인이 활동할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보는 경험도 꼭 한번 해보고 싶어졌다. 작년에 아트러너를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초교육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네이버 카페 ‘2024 아트러너’ 게시판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파일럿 프로젝트 <모두의 마당으로 달려갑니다> 기획단을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아트러너 공식 활동과는 별개로 ‘신갈오거리 거리축제 4.27’에서 아트러너 부스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프로젝트였다.
일주일 동안 3번의 기획회의를 거쳐 그 주 토요일에 바로 축제를 치러야 하는 촉박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문화예술 기획팀 ‘플랜포히어’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지원했다. 모집인원은 10명인데 26명이 지원했다. 운이 좋게 선정되어 기획에 참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월, 수, 금 3일 동안 4시간 이상씩 기획회의를 했다.
첫 번째 회의날
먼저 용인문화재단 사업담당자의 프로젝트 소개가 있었다.
‘신갈오거리축제’에서 아트러너 부스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프로젝트라고 했다. 그리고 플랜포히어가 축제 기획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나무 기둥을 연결해서 2~3개의 입체 상자를 만들려고 합니다.”
“상자의 옆면을 비닐로 씌우면 투명한 벽이 생길 거고요 “
“비닐벽에 빨강, 파랑, 노랑 등 색색의 셀러판지를 붙이는 거예요.”
”겹겹이 쌓인 셀로판지에 햇빛이 비추면 재밌는 모습이 펼쳐지겠죠?“
한 번도 신갈오거리에 가본 적이 없던 나였다. 축제라고는 오래전에 한두 번 스쳐 지나가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플랜포히어의 기획안을 들었지만 도무지 무슨 행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주일 준비해서, 과연 이 행사를 치를 수 있을까?
문화기획팀 플랜포히어는 능숙하게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
“그럼, 이제부터 떠오르는 단어를 말해볼까요? “
이렇게 질문을 던진 후, 본인이 생각한 키워드를 거침없이 적어나갔다.
#축제#신갈오거리#봄#빛#색
“이제 선생님들도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정답은 없습니다. 무엇이든 좋아요 “
처음에는 쭈뼛쭈뼛 주위만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이 조금씩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억이요“
“알록달록 무지개요”
“재미있는 놀이요”
어느덧 화이트보드는 키워드로 가득 찼다.
우리는 생각나는 단어를 신나게 말했다. 의외의 단어가 나오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플랜포히어가 질문을 던지면, 우리는 나만의 답을 찾고, 그것을 함께 나누며 회의를 이어 나갔다. 4시간이 넘는 긴 회의였지만 30분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회의날
* 언제 : 24년 4월 27일
* 어디서 : 신갈오거리 축제
* 누구와 : 지역주민과 가족단위
* 어떻게 : 첫 번째 회의 때 정리한 중요 키워드
* 왜 : 어떤 경험을 하게 하고 싶은가
화이트보드 한쪽에는 첫날 이야기한 여러 키워드가 적혀있고, 다른 한쪽에는 언제, 어디서와 같은 축제의 개요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질문이 시작되었다.
“여기 적힌 키워드 중에서, 이번 축제에 제안하고 싶은 단어 5개를 골라볼까요?”
축제의 컨셉을 결정하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를 말했다.
#기억#놀이#색#누구나#함께#쉼터
플랜포히어는 결정한 단어를 조립해 이번 축제의 목적을 완성시켰다.
‘축제 참여자에게 아트러너가 제안하는 놀이와 활동을 통해 예술을 경험하고, 신갈오거리에서의 기억을 수집하고, 생성하며, 공통의 기억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제는 ’빛과 색과 기억의 상자‘가 되었다.
이제 구체적인 준비만이 남게 되었다. 조형물을 만들고, 물품을 준비하고, 부스설명, 안내 등 디자인작업을 해야 한다. 또다시 뭐부터 해야 하지? 어리둥절하는 우리에게 플랜포히어팀이 다가왔다.
“축제날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세요.”
“4월의 따뜻한 봄날에, 차량이 통제된 텅 빈 거리 위에, 햇살이 내리 쭤고, 우리의 부스가 놓여있고, 나무 기둥으로 만든 입체 상자가 있는 풍경을요”
그렇게 머릿속으로 장면을 상상하다 보면 준비할 것들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리고는
다른 프로젝트에서 사용한 타임테이블과 물품리스트 파일을 설명해 주었다. 자세히 적인 파일을 보고 나니 준비에 가속도가 붙었다.
축제 당일
4월 27일 오전 9시쯤 신갈오거리 축제 현장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조형물팀은 나무기둥 4개를 연결해 사각형 틀을 만들고, 그 사각형틀 4개를 붙여 입체 상자를 만들었다. 다시 입체 상자 3개를 가로로 연결했다. 터널 모양의 상자를 세우고, 상자의 측면에 비닐의 씌우니 투명한 벽이 완성되었다.
나는 디자인팀으로 활동하며, 부스를 소개하는 안내판과 입체상자를 꾸밀 표시들을 챙겼다. 마지막 물품팀은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에 서로 다른 크기와 색을 가진 셀로판지 조각을 담았고, 붙이는 도구인 풀도 챙겼다. 어젯밤까지 상상만 하던 장면이 현실이 되어 짠!~하고 나타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오전 11시, 축제가 시작되었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함께 온 엄마와 아빠,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와 함께 그분의 속도로 걸어오는 가족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여자 친구 두세 명이 팔짱을 낀 채 우리 부스에 방문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두 개씩 붙인 셀로판지 조각들이 모여 투명비닐벽을 가득 채웠다. 모두의 상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일찍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고, 축제장소로 이동해 부스를 꾸미고, 정신없이 행사안내를 하더보니 어느덧 정오가 되었다.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부스 옆에는 달고나 만드는 체험을 하고 있었고, 반대편에는 사물놀이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설탕 녹는 달콤한 냄새도, 신명 나는 사물놀이 소리도 이제야 느껴졌다.
어느덧 우리가 만든 조형물은 빛과 색과 기억의 상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대 여섯 걸음 뒤로 물러서서 우리 부스의 전체적인 풍경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4월의 따스한 봄 하늘, 쏟아져 내린 햇빛은 모두의 상자에 그대로 닿았다.
투명한 비닐벽을 지나, 색색의 셀로판지 조각을 통과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햇빛 덕분에 셀로판지 조각은 원래의 색보다 더 투명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그리고, 아스팔트 바닥에는 세상에 하나뿐인 알록달록 그림자가 만들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