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표성이 없는 불확실한 자료만을 가지고 바로 어떤 결론을 도출하는 데서 발생하는 논리적 오류.
봉사부장으로서다양한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나는 학급 매번 친구들을 인솔했다. 동사무소(현 행정복지센터)와 우체국 같은 관공서, 노인정, 노인요양원 등등의 노인복지시설, 보육원, 영아원 등등의 아동복지시설, 그리고 종합사회복지관에서의 활동을 했다. 그리고 거리 청소 봉사와 연탄 나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분야의 봉사활동을 했다.
봉사활동을 한다고 매번 보람과 기쁨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 보람된 순간이 더 많았지만, 때때로 우리가 만난 복지 현장의 열악함은 화나게도 하였다. 또한봉사부장이라서 격은 인솔자로서의 어려움과 우리를 귀찮아하던 어른들의 반응 등으로 지치고, 울고 잠 못 든 밤도 있었다.
때는 여름, 영아원이라는 곳으로 봉사하러 가는 날이었다. 지금이야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모르는 곳도 금방 찾아갈 수 있지만, 그때는 주소와 지도만으로 찾아야 했다. 지도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중학생들이 묻고 또 물어 한 시간여를 헤맨 끝에 겨우 목적지였던 복지시설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너무 많이 헤매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아침부터 푹푹 찌는듯한 그날의 날씨는 우리를 더 지치게 했다.
‘띵동!’
벨을 누르자 이내 한 여성분이 나왔다. 허름한 앞치마를 두른 깡마른 그 여성은 대충 묶은 머리와 귀찮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슨 일이죠?”
“저... 저희 봉사활동 왔는데요.”
퉁명스러운 말투에 주눅이 들어, 작은 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학생들. 여기는 미리 약속하지 않고 불쑥 찾아오는 곳이 아니에요.”
“저.. 저희는 2주 전에 여기 원장 선생님과 전화로 방문 약속했어요.”
“난 들은 바 없는데,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려봐요.”
우리를 땡볕에 세워두고 쌩하니 돌아서는 그녀는 혼잣말인 듯 “학생들이 뭘 할 수 있다고”라고 하였다.
단 몇 분이었지만, 한참을 헤매고 지친 몸으로 땡볕에 서 있으려니 좋은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오고도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에 함께한 친구들도 나도 화가 났다.
그분이 다시 돌아와 우리를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였다. 방에는 까만 눈으로 옹알옹알하는 갓난아기부터 손 닿는 곳을 붙잡고 일어서서 몇 발 걷다가 주저앉는 유아도 있었고, 조금 더 큰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과 한 시간 정도 놀아주면서, 여기 이 기저귀를 접어 바구니에 넣어 두어요” 그녀는 여전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우리에게 일감을 주었다. 우리는 알려준 방법으로 면 기저귀를 접었고,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우리를 보고 “엄마~ 엄마” 하는 아이를 보면서 맘이 뭉클하기도 했다. 꼭 안아주니 아이들은 품 안에서 행복해하며 웃었다. 아이들에게서 달큼한 분유 냄새가 났다. 우리는 네 명뿐이었는데 그 많은 아이가 서로 안아 달라고 했다. “엄마~ 엄마~” 하며 매달렸다. 아이들을 안아주느라 팔이 아프기도 했지만, 조금 더 안아주고 싶어서 한 아이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다른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때, 우리를 처음 맞이했던 보육사가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크게 화를 냈다.
“아니, 놀아주라고 했더니 왜 안아주고 있어요? 안아주면 손 타서 얼마나 힘든데!”
손 타는 것이 무슨 말인지도 이해하지 못한 아직 어린 중학생인 우리로서는 그 보육사의 호통과 우리가 왜 혼나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20대 사회복지 현장에서 햇병아리를 막 벗어나던 그즈음이었다. 그때의 그 영아원을 다시 방문할 일이 생겼다. 그곳을 다시 방문하고 난 후 그제야 그 시절 보육사 선생님의 호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도 사회복지 현장이 어렵고 힘든데, 내가 중학생이던 30년 전은 그저 사회복지현장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야 할 만큼 사회복지시설의 여건은 열악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분도 지치고 힘들었으리라. 우리야 하루 왔다가 가는 사람일 뿐이지만 손 탄 아이들이 밤새 안아달라고 얼마나 보챘을지 생각해보니 그날 그분의 호통을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점심시간이었다. 유아기의 아이 6명이 밥이 담긴 쟁반을 안고 오는 보육사를 보고는 반가이 다가갔다. 누워서 젖병을 물고 있는 영아를 제외하고, 6명의 아이는 밥을 하며 “밥. 밥”하며 기뻐했다. 보육사 선생님이 아이를 한 명 한 명 자리 잡아 동그랗게 앉게 하고 밥을 꺼내는데…… 아이는 여섯인데 밥은 커다란 냉면 그릇 하나, 숟가락도 하나. 커다란 냉면 그릇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솟는 자장밥이 담겨 있었다. 숟가락 하나로 슥슥 비벼 아이들에게 한 입 한 입 먹이는데, 모습이 어미 새가 아기새에게 먹이듯 듯한 모양새였다. 아이들은 한 입 받아먹고는 이내 다시 달라고 입을 벌리고 보챘다. 그런데, 둘러앉은 아이 중 한 명은 눈병이 나 있었고, 한 명은 콧물을 흘렸으며, 한 명은 기침했다. 중간중간 아픈 아이들과 함께 건강한 아이들이 섞여서 선생님 한 명이 든 하나의 숟가락으로, 한 그릇의 밥을 받아먹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혼난 후라 무어라 말하지도 못하고 속으로 화를 삭였다. 점심 식사 후, 설거지를 마치고 영아원 대문을 나서는 우리 네 명 친구들의 마음은 참담하였다.
“우와, 이래도 되는 거야?”
“그렇지? 나만 화나는 거 아니지?”
우리는 방금 우리가 보고 나온 상황에 대해서 다 같이 분노하며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그게 밥이냐? 어떻게 그렇게 먹일 수 있지? 그러면 다른 아이들도 기침하고 콧물 흘릴 거 아냐! 씨!”
씩씩거리며 말을 이어가던 우리는 어느새 아이들에 대한 환경이 나쁜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퉁명스레 대하였던 그곳의 직원들을 향해 언성이 높아졌다.
“우리는 좋은 일 하려고 왔는데 왜 우리한테 막 머라 하고 그러냐?”
“맞아, 우리 귀찮아하고, 소리나 치고……. ”
“나도 아기들이 불쌍해서 눈물 나려고 해.”
“선생님께 말해야 하나? 경찰에 신고해야 할까? 그런 사람들 처벌하는 법은 없나? 그 사람들 사회복지사라고 했지? 착한 척하는데 알고 보니 나쁜 사람들이네!”
중학생 소녀 네 명이 땡볕을 걸어가며 씩씩대고 울분을 토해냈다.
그날, 나는 사회복지사는 좋지 않은 직업이라 단정했고, 절대로 사회복지사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만난 한 명을 전체라고 생각하고 화를 냈던 30년 전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