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어야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쓴 ‘손자(孫子)’의 이름은 ‘손무(孫武)’입니다. 역사적으로 강력한 권력이나 힘이 있는 사람의 이름에는 ‘무(武)’자(字)가 들어가는데 손무(孫武)도 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손무(孫武)가 ‘손자(孫子)’라는 칭호를 받은 것으로 보아 ‘공자(孔子)’, ‘맹자(孟子)’처럼 위대한 인물의 반열에 오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손무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제(齊)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군사 전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병법에 큰 관심을 보였고 검술에도 능했습니다. 손무의 집안이 정치 투쟁에 휘말려 손무는 오(吳)나라로 이주하게 됩니다. 당시 오나라 왕은 ‘합려(闔閭)’였습니다. 손무는 오왕에게 가서 자신을 장군으로 임명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이미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저술했다는 사실을 오왕 합려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청 자체는 어렵지 않았죠.
합려는 손무의 병법이 탁상공론은 아닌지 시험을 합니다. 자신의 궁녀 180명을 대상으로 이 궁녀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할 수 있으면 지휘 능력을 인정해 장군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손무는 ‘인원이 많으면 나눈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180명을 90명으로 나누어 집합시키고, 왕이 가장 총애하는 궁녀 두 사람을 지휘자로 임명합니다. 손무는 합려로부터 부월(斧銊)을 받습니다. 부월(斧銊)은 임금의 명령을 상징하죠. 궁녀들 앞에 선 손무는 ‘차렷, 좌향좌, 우향우, 뒤로 돌아, 앞으로 가’ 등 기본 동작들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명령을 하달합니다. ‘전체 우향 우’ 명령을 하달했지만 궁녀들은 웅성거릴 뿐 말을 듣지 않습니다. 평생 귀하게 대접받던 몸들이 어찌 군대 훈련을 받겠습니까. 손무는 다시 한번 기본 동작들을 가르치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참수(斬首)하겠다고 주의를 줍니다. ‘뒤로 돌아’ 다시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궁녀들은 여전히 시끄럽게 떠듭니다. 순간 손무는 ‘명령이 불명확할 때는 장수가 책임을 지지만 명령이 명확한데도 따르지 않으면 지휘자의 책임이다’고 하면서 왕이 가장 총애하는 궁녀 두 명을 참수합니다. 그리고는 왕이 총애하는 궁녀 두 사람을 다시 새로운 지휘자로 임명하죠. ‘앞으로 가’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모르는 궁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합려는 손무의 지휘 능력을 인정해 장군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손무는 오나라 군대를 막강한 군대로 만들고 오왕 합려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첫 패자(霸者)로 기록됩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의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은 최상의 방법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고 손무는 말합니다. 궁녀들을 참수하지 않고 자신의 지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임을 알고 있는 손무가 궁녀의 목숨을 앗아가며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남의 목숨을 빼앗고 있는 것이죠. 손무의 병법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을 생각하면 시대를 고려하더라도 그에게 최고의 병법가라고 부여한 ‘손자(孫子)’라는 칭호가 왠지 낯설게 다가옵니다.
『한비자(韓非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춘추시대 정(鄭)나라 무공(武功)은 호(胡)나라를 치고 싶어 자신의 딸을 그 호왕에게 시집보냅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군사를 일으키고 싶은데 어느 나라를 치면 되겠는가?” 대부(大夫)인 관기사(關其思)라는 사람이 “호(胡)를 치면 됩니다.” 그러자 무공은 “호는 형제의 나라인데 어찌 호를 치자고 하느냐?”고 하면서 관기사를 죽입니다. 호의 군주는 이를 전해 듣고 정나라가 자신들과 가까워졌다고 여겨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정나라 군사가 호를 갑자기 공격하여 그 땅을 빼앗고 맙니다. 춘추시대는 빼앗지 못하면 빼앗기는 시대였습니다. 시대가 불의(不義)를 용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대에는 이렇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송(宋)나라는 꽤 강한 나라였습니다. 특히 ‘양공(襄公)’은 춘추 패자(霸者)를 꿈꿀 정도로 야망도 있었고 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楚)나라의 반대로 패자의 자리가 무산됩니다. 결국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송나라는 진을 치고 적을 기다립니다. 초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기 시작했죠. 이때 송나라 신하들이 양공에게 공격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양공은 ‘상대가 준비를 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면서 상대가 진을 치고 준비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힘에서 밀린 송나라는 크게 패하고 양공은 이때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목숨을 잃고 맙니다.
양공의 리더십은 어떻습니까? 평시라면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리더라고 칭송을 받았을 테지요. 그러나 나의 군사를 지키고 내 백성을 지켜야 하는 전쟁 상황입니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짊을 베푼 송양을 사람들은 비웃었죠.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소개된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고사의 유래입니다. 훗날 맹자(孟子)는 양공의 이러한 자세를 칭송했지만, 상황 파악을 잘못한 리더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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