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식탁
자기 전 넷플릭스로 20-30분짜리 쇼를 하나씩 보는 게 재미다.
그것도 최근 쇼보다 옛날에 텔레비전으로 방영했던 쇼, 가능하면 시트콤으로.
이 습관은 넷플릭스가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한 이래 계속되었는데, 내게는 하루를 마감하는 일종의 의례와 같다.
아무튼 그렇게 한 일 년은 사일필드(Seinfeld)를 열심히 봤다.
전 시즌을 몇 번 반복해서 시청했고, 마침내 이번에 새로운 쇼로 바꾸었다.
나는 이 쇼를 새로 보기 시작했지만, 첫 방영한 지는 꽤 된 듯하다.
한국에서 꽤 유명하고 팬도 많아 보인다.
뭐냐 하면, 바로 심야 식당.
사실 영어로 대화하는 쇼를 주로 본다.
그 외 국가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은 거의 보지 않는다.
화제가 되는 한국 드라마의 경우, 물론 그때마다 시도해 보긴 한다.
하지만 좀처럼 집중이 안 되어 첫 화가 끝나기도 전에 곧 다른 쇼를 찾는다.
그러나 15년이 넘는 넷플릭스 생활의 결과, 영어로 대화하는 30분 안팎의 옴니버스식 쇼는 다 봐 버렸다.
넷플릭스 안을 수차례 뒤지다 더는 볼 게 없어 결국 이번에 큰 도전을 했다.
처음에는 재미없거나 산만할까 봐 못 미더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게다가 일본 쇼는 처음이라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는데, 이 정도면 엄선한 것 같다.
세련된 맛은 떨어지지만 소박하고 자극적이지 않아 좋다.
첫 시즌의 대여섯 개의 에피소드를 지금까지 무리 없이 봤으니, 끝까지 본 후 이어 여러 번 반복할 것 같다.
신파의 경계를 오가는 아주 통속적인 이야기임에도, 단출하게 흘러가서인지 담백하다.
밤에만 문을 여는 어두운 선술집, 밥집이 배경인지라, 전반적으로 톤 다운된 화면과 차분한 음악이 보는 내내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나름 인류애를 자극하지만, 그 정도가 빙그레 웃음 지을 만한, 잔잔한 수준이다.
보는 동안 내 감정이 요동치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도 마음에 든다.
이런 전반적인 분위기와 구성 못지않게, 흥미 있게 보는 것은 마지막 소개해주는 요리법이다.
에피소드마다 이야기의 중심축 역할을 하는 음식이 마지막 1분 남짓 간단히 소개된다.
심야식당의 주인, 즉 사람들이 마스터라 부르는 남성이 설명하기도 하고, 해당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전달하기도 한다.
자기 전 보다 보면 "조만간 저렇게 꼭 해 먹어봐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그중 기억에 남는 요리법이 포테이토 샐러드였다.
유명한 애로 배우인 중년 남성이 직업 때문에 가족과 연을 끊고 살다가, 20년 만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아가는 이야기에 나온다.
그 중년 남성이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음식은 바로 어머니가 해줬던 포테이토 샐러드였다.
하지만 그 남성은 직업 때문에 가족을 찾아갈 수 없었고, 그 탓에 긴 시간 어머니의 샐러드를 맛보지 못한다.
대신 어머니의 샐러드와 맛이 비슷한 마스터의 샐러드를 먹는다.
심야식당에서는 이 샐러드가 서비스로 나오기 때문이다.
여차저차해 그는 오래간만에 고향집을 찾아간다.
그새 어머니는 치매 노인이 되었다.
치매 노인인 어머니는 그에게 여전히 포테이토 샐러드를 만들어 준다.
고향에서 도시로 돌아온 그는 심야식당에 다시 들른다.
그곳에서 모처럼 만난 사람들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오열한다.
그런 그에게 마스터는 말없이 포테이토 샐러드를 한 접시 가득 내어준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포테이토 샐러드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한국에서도 흔하디 흔한, 아무 데서나 볼 수 있고 그 맛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포테이토 샐러드가 어쩐 일인지 보는 내내 맛있어 보였다.
주인공 남성이 접시에 푸짐하게 담긴 포테이토 샐러드를 세상에 둘 도 없는 음식인 양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히 그 맛이 궁금해지고, 나도 포테이토 샐러드를 좋아한다는 착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마요네즈가 기본인 샐러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에그 샐러드, 포테이토 샐러드, 고구마나 단호박 샐러드 등등, 무거운 느낌의 샐러드에는 평소 손이 잘 안 간다.
이런 샐러드는 예전 피잣집이나 샐러드바가 있는 뷔페에 가면 꼭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는데, 동행한 이가 그런 류의 샐러드를 퍼 오기라도 하면, 먹을 게 이리 많은 데 그걸 먹냐고 타박하기까지 했다.
세상에, 그런데 그걸 보고 내가 따라 하기까지 하다니.
어쩌면 그 에피소드에서 함축적으로 묘사되는 남성의 삶,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런 삶에서 비롯된 복잡다단한 마음, 그리고 그에게 넌지시 샐러드 한 접시 챙겨주는 마스터의 돌봄, 나아가 심야식당에서 만난 주변인들의 오지랖 넓고 다정한 관심이 포테이토 샐러드의 맛으로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나도 그들의 마음을 아니까, 나도 그런 시간을 겪었으니까, 내게도 그런 이들이 옆에 있으니까.
그들을 향한 공감과 연민이 나도 아는 맛으로, 공유된 맛으로 감각된 것 같다.
우리가 먹는 것이 단순히 물질은 아닐 것이다.
또 입에서 씹어 넘겨진 후 긴 소화과정을 거쳐 온몸에 축적되는 것 역시 물질만은 아니다.
인간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말은 인간이 빵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한 빵 한 조각에는 기억과 추억, 경험, 기대가 담겨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응축된 시간을 오롯이 견딜 때, 우리는 사람이 된다.
인간으로서 맞닥뜨리는 조건을 회피하지 않을 때, 삶에 기꺼이 나를 던질 때, 생명을 얻는다.
심야식당에 나오는 요리법은 특별하지 않다.
어떤 음식은 불을 쓰지도 않는다.
간장만 쪼르륵 뿌려 먹거나 물에 말아먹거나 가쓰오부시 한 줌 얹어 먹는 게 전부인 식사도 있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대여섯 살 무렵 밥을 너무 먹지 않아 엄마가 특단의 조치로 간장과 참기름을 넣어 비벼준 밥이 떠오르기도 했고,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중학생 때 친구들과 강남역에서 처음 사 먹어본 가츠동이 생각나기도 했다.
나도 아는 그 맛은 나만 아는 기억, 내 삶에 고이 모셔져 있는 추억을 불러온다.
다시 누군가와 함께 하고, 경험하고, 내 몸과 마음에 새겨 넣을 거리를 기대하게 한다.
그만저만하고 어지간한 음식은 별 게 없기도 하지만, 그래서 무던한 삶에 제격이다.
먹는 게 중요한 건, 삶이 중요해서다.
포테이토 샐러드, 2인분
감자 중간 것 네 개
양파 반 개
오이 반 개
당근 반 개
편의점 소시지 한 개(70g)
마요네즈
소금
양파는 잘게 다져놓는다.
오이와 당근은 얇게 썰고, 소금을 넉넉히 두어 꼬집 정도 뿌려 10분 절인다.
절여진 오이와 당근은 면포에 싸서 물기를 꼭 짜준다.
소시지나 햄은 잘게 다져 그릇에 담는다. 그다음 그릇에 끓는 물을 붓고 3분 정도 둔 후, 체에 밭쳐 물기를 완전히 제거란다.
감자를 삶는다.
감자는 깨끗이 씻은 후, 껍질째 삶는다. 심야식당의 설명에 따르면, 껍질째 삶아야 감자의 단맛과 감칠맛이 좋다고 한다.
삶는 법은 감자가 자박자박 잠길 정도의 물을 냄비에 붓고 끓이다가 물이 끓어오를 때 감자와 소금을 한 꼬집 넣고 20분 정도 더 삶는다.
삶은 감자는 뜨거울 때 깨끗한 행주나 면포로 싸서 살살 껍질을 까준다.
껍질을 벗긴 아직 뜨거운 감자를 살살 으깨다가, 여기에 바로 다진 양파를 넣고 함께 섞는다.
역시 심야식당에 따르면, 감자가 식기 전에 양파를 넣으면 적당히 부드러워져서 맛있단다.
감자가 곱게 으깨졌고, 양파도 적당히 섞였으면, 마지막으로 오이, 당근, 소시지를 넣고 섞는다.
다 섞은 내용물을 한 김 식힌다. 금세 식는다.
감자의 열기가 어느 정도 사라졌을 때 마요네즈를 넣는다.
마요네즈는 취향껏 넣으면 된다. 대신 처음부터 많이 넣지 않고, 두어 숟가락씩 넣고 섞으면서 간과 식감을 맞춘다.
마요네즈를 적당히 넣었는데도 싱거우면 소금으로 간한다.
심야식당의 마스터의 방법대로 포테이토 샐러드 완성.
접시 한가득 넉넉히 담아서.
감자와 마요네즈 덕에 고소하고, 당근과 오이 덕에 상큼하면서 씹는 맛도 있다. 중간에 하나씩 씹히는 소시지 맛도 좋다.
샐러드지만, 은근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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