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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님이 Oct 15. 2022

알바와 육아, 그 틈바구니

 기록은 나를 더 쓸모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 알바.

  직장을 그만두고 여러 달이 지나갑니다. 운 좋게 10시부터 4시까지만 일하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했어요. 육아를 하는 엄마들에게 10시부터 4시까지 할 수 있는 알바란 기적과도 같은 일인데요. 거기에 임시라 하더라도 제가 쓸 수 있는 책상이 마련된 사무직이란 환경은 더욱 그럴싸하게 느껴집니다. 더운 날 덥지 않게, 추운 날 춥지 않게 일할 수 있는 작업 환경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번 알바는 사무실에 앉아서 컴퓨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하는 일인데, 책임자에게 한 달이면 충분히 끝난다고 걱정 말라고 했어요. 만만해 보였거든요. 그런데 아뿔싸. 흩어져 있는 자료들은 한 번의 가공도 거치지 않은 싱싱한 날 것 그대로의 것, 게다가 이전 담당자들의 개성이 모두 보일 만큼 제 각각의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자료들. 한 달은커녕, 영원히 마무리될 수 없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원래는 한 달짜리 초단기 알바였는데, 결국 일은 연장되었고 완벽하게 빨리 일을 끝내 인정받겠다던 오기는 이미 내려놓은 지 오래, 그저 큰 사고만 막을 수 있도록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여전히 맞추어질 기미가 안 보이는 자료를 맞추고 또 맞추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은 내려놓아야 했지만, 일이 연장되니 수입도 늘고, 꽤 괜찮은 알바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말이죠.


  모든 일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수입을 벌 정도의 아르바이트들은 그렇게 높은 전문성이나 능력치를 요구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이번 일만 해도 그저 저에게 특별히 요구되었던 능력은 기본적인 엑셀 능력과 무거운 입이었습니다. 무거운 입은 생각보다 밥벌이를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죠.

  회의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내거나 직장상사의 질문에 순발력 있는 답을 말하지는 못해도 무거운 입은 성실함과 신뢰감을 줘야 하는 영역에서는 나름 빛을 발할 때가 있습니다. '성실함'과 '무거운 입'은 나이와 시간의 힘이 더해지면 그 어떤 능력보다 더 자주, 크고 작은 인생의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늘도 '입은 무겁게, 몸은 가볍게'를 다짐해 봅니다. 현실은 그 반대일지라도 말이죠.  


# 육아와 가사.

  물론 알바를 하고 나서는부터는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막내를 하원 시키면서 근처 마트와 반찬 가게에서 저녁식사 장을 봅니다. 어느새 놀이터로 내 뺀 막내가 어떤 친구들과 노는지 살짝 살피고는 집에 도착해 저녁을 준비합니다. 그 사이 밀린 청소와 빨래는 하기도 하고 건너뛰기도 합니다. 저녁식사 준비라고 해봤자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반찬 1-2가지를 조리하거나 사온 반찬을 내다 놓는 일이 전부이지만 그래도 하루 중에 가장 바쁘고 가장 부지런한 시간입니다.

  영어학원에서 돌아온 1호, 놀이터에서 축구를 하고 돌아온 2호, 같은 놀이터에서 포켓몬스터 거래를 하고 놀다 온 3호가 모두 모이면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입니다. "흘리지 마라, 골고루 먹어야지, 이건 뼈에 좋은 건데 한 번만 먹어봐. 만화책은 밥 다 먹고 봐라." 밥을 먹는 건지 잔소리를 듣는 건지 모를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가면 삼 남매의 숙제와 공부를 봐줍니다.

  1호는 알아서 하고, 3호는 흉내를 내고, 2호는 엄마와 늘 기싸움을 벌이죠. 하루 30분이지만, 이 30분 동안 아들과 저의 기싸움이 만만치 않습니다. 논리나 현란한 말솜씨가 아니라 바로 버티기로 들어가는 아들과의 기싸움을 하기에 저는 이미 너무 녹초가 되어 버려서 늘 아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나고 말아요.

 

 이제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간. 아이들은 만화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고 저는 집 앞 공원으로 산책을 하기 위해 현관문을 나섭니다. 한 손에는 음식물쓰레기를 들고서요. 공원을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빵집이나 슈퍼에 들러 내일 아침에 먹을 간단한 먹거리를 삽니다. 산책할 공원과 작은 슈퍼, 늦게까지 문을 여는 동네 빵집이 바로 집 앞에 있다는 것. 편안한 일상을 만들어 주는 그 작고 익숙한 가게들에게 다정한 마음을 보내봅니다.


# 그리고 그 틈바구니

 그러고도 조금의 시간과 체력이 남으면 일기를 쓰고, 기록을 합니다. 당분간 1.2배속으로 살자고 마음을 먹었어도, 그건 마음의 일이고 몸은 그렇지 않으니 비타민이고 아르기닌이고 몸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 일단 입에 털어 넣습니다.

  일상이 빠르게 지나갈수록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더 커져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기억들은 반드시 빛이 바래질 텐데. 지금이 아니면 너무 늦을 것 같은데. 마음과 일상의 간극이 너무 커서, 때로 아쉽고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몸을 탓하지 않고, 그저 마음이 더 부지런한 까닭이라고 생각하기로 합니다. 마음은 늘 몸보다 먼저 훌쩍 저 먼 곳까지 가 있으니까요.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내기 위해 오늘도 조각조각 나뉘어 있는 저의 시간들을 다이어리에 기록하고 이리저리 모아봅니다. 저는 오늘 밤 또 아이들보다 먼저 잠들겠지만, 일상을 거뜬히 살아내고도 조금 더 힘이 남아 글도 쓰고 기록도 해나갈 수 있는 생활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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