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급식 레시피를 기록했던 이유
둘째를 출산하고, 3년째 쯤 되었을 때 아르바이트를 했다. 11시부터 1시까지 매일 두 시간, 중학교 점심시간에 급식을 배분하는 일이었는데, 단순한 일이었다. 조리된 음식을 식당으로 나르고, 식사 시간이 되면 학생들에게 국과 반찬을 나누어 주고, 급식이 끝나면 남은 음식을 치우고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700여 명의 중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기 때문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노동 강도가 결코 낮다고는 할 수 없었다. 두 시간을 몰아치고 나면 다리가 휘청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일하고 받았던 알바비는 공휴일이 있는 날은 한 달에 25만 원, 없는 날은 30만 원 정도. 딱 아이들 간식비를 벌 수 있었다.
석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영양사가 사무실로 나를 부르더니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고 싶다고 했다. 중학교 급식실은 초보를 잘 쓰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 파격적인 제안을 해주다니. 지난 석 달 영양사 마음에 쏙 들 정도로 그렇게 일을 잘했단 말인지. 영양사의 적극적인 추천과 평소 나를 눈여겨봐 왔던 조리실 조리장의 암묵적 지지로 나는 초단기 시간 알바생에서 삼 개월 만에 급식실 정식 직원이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나중에 안 진실은 이랬다. 당시에 해고된 조리 직원과 영양사 간에 깊은 갈등이 있었고, 그 해고된 직원이 교감선생님을 찾아가고, 조리장과도 엮이면서 일이 일파만파 커지다가, 조리 직원이 스스로 사직서를 내면서 일이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여러 사람이 얽히고설키면서 복잡했던 내부 문제에 질려버린 당시의 교감선생님을 비롯한 인사권자들이 신입 채용은 무조건 아예 생초보를 뽑기로 한 것이었다. 이런 내부 갈등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가 낫겠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아예 모르는 사람을 쓰느니, 그래도 몇 개월 일해 본 초보가 낫겠다고 판단해 나를 채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특별채용된 나는 낙하산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밥, 국, 반찬, 후식까지 매일 바뀌는 식단표를 익히기 위해 한 달 식단표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그날 배운 레시피를 비롯해 용어, 주의점 등등을 세세히 기록하고 메모했다.
'밧드'는 업소용 스텐용기를 말하는 것이고, 주메뉴 반찬은 8인치 밧드에 담고 샐러드 등의 반찬은 4인치 밧드에 담아야 하며, 튀김 적정 온도는 얼마이고.... 등등을 말이다.
그리고 모조리 외웠다. 틈틈이 공부해 한식조리사 자격증도 땄다. 경력이 부족하지만, 그런 나를 뽑아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초짜여도 너무 초짜라는 사실이었다. 30분 안에 혼자서 공동 식당 한 개를 온전히 맡아서 음식을 치우고 쓸고, 닦고, 물기까지 제거하는 일은 몇 달을 해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손에 맞지도 않는 고무장갑을 끼고 파프리카를 열 개씩 포개어 썰어내는 일, 펄펄 끓는 기름에서 머리통보다 큰 튀김 망을 가지고 정확한 온도에서 고등어를 기름통에서 건져내는 일, 발에서 계속 벗겨지는 급식실 장화를 신고 뛰지 않으면서 빠르게 몸을 움직여 내야 하는 일, 식판을 열 손가락 사이사이에 껴서 소독하기 편하게 한 번에 펼쳐 놓는 일. 그런 것들은 기록하고 암기해서 익힐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리고서야 알았다. 내가 몸으로 배우고, 익히는 것에 얼마나 취약한 인간인지를.
조리실 작업은 모든 작업이 연결되어 있어, 한 작업이 늦어지면 연쇄적으로 다음 작업이 늦어지게 되므로 각자 맡은 부분에서 제대로 된 속도를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늘 어긋났고, 결국 나의 속도에 따라 전체 작업시간이 연장되거나, 더욱더 연장되었다. 동료 조리원들 중에서는 괜찮다고 하며 등을 두드려주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대놓고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급식실 일이 그만큼 고되고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부재료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깜빡하면서 나로 인해 조리 순서가 꼬여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실력이 늘지 않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조리장은 그날, 작정한 듯이 급식이 끝나자마자 조리원 모두에게 급식실로 모이라고 했다. 나를 훈계하기 위해 모두를 불러 세운 것이었다. 잘한 것은 없으니, 일잘못 하는 사람답게 고개를 푹 숙이고 듣고 있었는데, 결국 조리장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머리가 나쁘면 노력이라도 해야지".
동료들은 기가 죽어버린 나에게 커피도 사 주면서 조리실이 워낙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서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고.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래, 일이 위험해서 작은 실수도 큰 사고로 이어지니까. 그랬을 거야. 그러나 그날 이후로 조리장의 태도는 더욱더 싸늘해져 갔다.
나의 미능숙함 하나하나를 머리가 나빠서라고 했고, 노력을 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럴수록 나는 긴장했고, 실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다른 조리원들처럼 실수하고 조리장의 핀잔을 들어도 웃으면서 넘어가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하나를 지적받으면 더 긴장하고 더 뻣뻣하게 조리장을 대했는데, 그런 내가 조리장 눈에 예뻐 보였을 리 없었을 것이다.
중간에 나가 버리면 일도 못하더니, 무책임하다는 소리까지 들을 것 같아서 일 년은 버티고 재계약 때 퇴사하겠다며 오기와 무기력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때, 셋째를 임신하였다. ‘임신으로 인한 중도 퇴사'.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헤어졌으니 나에게도 조리장에게도 다행이었다.
집에 틀어박혔다. 기회인 줄 알고 잡았는데 그것이 내 인생 최악의 선택이었다는 사실, 내가 잘 보이고 싶었던 사람이 나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몸도 마음도 회복하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 매일 기록했던 학교 급식 레시피는 이사하면서 모두 없애버렸다. 이사하면서 그 기억까지 가지고 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줄 알았다면, 남겨둘 것 그랬다. 아쉽다.
내 서른의 무기력했던 기록을 마음속에 꼭꼭 숨겼다가 마흔이 넘어서야 조심스레 꺼내 놓는다. 이제 괜찮은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떻게든 조리장 마음에 들기 위해 서울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제과점의 빵을 사서 집에 간 저녁, 둘째가 그 빵을 조금 먹었다고 불같이 화를 냈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몸의 어딘가가 미세하게 떨려온다. 아직은 안 괜찮구나.
다행히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썼던 학교급식 레시피와 같은 내용은 더 이상 기록하지 않는다. 서른에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늘 분주했는데, 세 아이를 키우고 마흔을 넘기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렁이던 욕망도 성과를 내고 싶어 안달했던 마음도 좀 더 내려놓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 지, 언제 행복한 지를 기록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지지리도 못나 보였던 경험도 이렇게 쓸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그때도 학교 급식 레시피가 아니라, 지금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기록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