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덕후의 일기 이야기(1)
일기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림일기에서 부터 한 줄일기, 세 줄 일기, 감사 일기, 모닝 페이지, 만년 일기까지 다양한 일기를 쓰고 기록해 오고 있다. 쓰다 보니 '장비병'도 생겨서 온갖 문구류를 섭렵하여 요즘은 아예 인스타그램에 기록 계정을 만들어놓고 일기와 문구류를 자랑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지루한 시간이 꾸역꾸역 이어지던 어느 날, 아는 언니가 동네에 나랑 비슷한 엄마들을 몇몇 모아놓고, [아티스트웨이] 책모임을 하자고 제안을 해왔다. 12주를 따라 하기만 하면 우리 안에 꽁꽁 숨겨져 있는 창조성을 일깨워 준다고 했는데, 모유수유와 독박 육아에 생기를 잃어갔던 나와 동네 친구들은 창조성과 아티스트라는 말에 넘어가 빛의 속도로 모여서 책모임을 시작하였다.
창조성을 일깨우는 그 책의 비법이란 다름 아닌 '모닝 페이지'로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무의식의 상태에 있는 나의 생각을 끄집어내서 무조건 3장을 글로 채우는 것이었다. 노트 크기는 상관이 없었는데, 일반 다이어리 노트를 준비한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나는 그때도 일기에 진심이었던 바, 내 열정의 크기를 보여줄 수 있는 A4용지를 넉넉히 준비했다. 이왕 쓰는 거 제대로 써보자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새벽마다 아이가 깰까 봐 불도 켜지 않은 채, 최대한 불빛이 새 나가지 않도록 웅크리고 앉아서 A4 3장씩을 꼬박 채워나갔다. 피로가 쌓인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몰랐기에 새벽이면 다시 말짱한 정신으로 일어나 모닝 페이지를 채워갈 수 있었다. 어느 날은 내가 가여워 흐느끼기도 하고, 어느 날은 신들린 사람처럼 꺼억꺼억 울기도 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모닝 페이지에 욕하나 쓰기도 민망했는데, 한 번 물꼬가 트이니 남편, 시어머니, 직장상사, 친정엄마, 결국 과거 친구까지 소환해 영역을 가리지 않고, 나의 욕 잔치는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일기라기보다는 살생부에 가까웠던 나의 모닝 페이지. 그래도 신기한 건 나의 욕이 늘어갈수록 내 삶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새벽, 아침에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허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며칠 전부터 허리를 펼 때 조금 불편하고, 자다가 돌아누울 때 아프긴 했지만 참을만했는데, 그날은 정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숙이지도 펴지도 못하는 자세를 하고 겨우 기어가다시피 해서 정형외과에 갔더니 의사는 척추측만증라며 의자에 앉아있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많이 걸으라고 했다. 그리고 요즘 안 좋은 자세로 장기간 하는 일이 있다면 잠시 안 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해 주었다. 그 당시 내가 안 좋은 자세로 장기간 하는 일이라곤 아침마다 쓰는 모닝 페이지밖에 없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파랬던가. 햇빛에 눈이부셨던가. 일기를 너무 열심히 쓰다가 정형외과를 가다니. 너무 한심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창조성이 뭐라고. 아침마다 그렇게 미련 곰탱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일기를 써 내려갔나. 그 시간에 잠이라도 푹 잘 걸.
그 후에 기회가 되어 내가 써 두었던 모닝 페이지를 읽게 보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것은 절대 열어보면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은 것이라는것을. 순도 100% 날 것의 감정이 그대로 적혀 있는 그 일기장을 누가 볼까 봐 나는 또 빛의 속도로 모조리 폐기 처분했다.
그렇게 한 달 여의 모닝 페이지는 내 마음속에서도 현실 속에서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게 되었다. 내 실패의 기록을 또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