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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Oct 20. 2024

마라톤 완주

https://groro.co.kr/story/12331



 마라톤을 완주했다. 그것도 풀코스를 완주했다. 42.195Km, 42,195m. 생애 첫 마라톤 완주다. 첫 마라톤 완주가 풀코스 완주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아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진짜 마라톤은 아니었다. 앞에 두 글자가 빠졌다. ‘독서’ 마라톤이다. 그렇다. 지역 도서관에서 장장 5개월이란 시간 동안 책 읽는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마라톤 컨셉으로 진행했다. 책 1페이지를 읽으면 2m로 환산해 주는 식이었다. 코스 길이 순서대로 한 대여섯 코스가 있었다. 나는 그중에 멋도 모르고 이왕 하는 거 풀코스로 가야지! 하면서 초정행궁이란 코스를 선택했다. 어디가 시점인지 모르겠지만 그곳을 기준으로 초정행궁까지 실제 거리가 42.195Km인 거 같다.



 여하튼 선택하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어... 뭔가 잘못된 걸 느낄 수 있었다. 1페이지를 2m로 환산해 준다고 했으니 42.195Km 그러니까 42,195m를 채우려면 21,098페이지를 읽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다시 말해 5개월이란 시간 동안 매일 150페이지 정도를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책으로 계산하면 300페이지 기준 70여 권의 책을 읽어야 했다. 한 달에 14권, 일주일에 3~4권을 읽어야 한다는 계산이었다. 잘못됐다. 상당히 잘못 선택했다. 성인이 된 이후로 책 자체를 좋아하고 책을 읽는 걸 좋아했지만 실제로는 책을 잘 읽지 못했다. 일 년에 몇 권 읽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래저래 계산하면 결론적으로 이틀에 한 권 꼴로 읽어야 했다.



 아... 그냥 포기하자 싶은 생각이 바로 들었다. 독서마라톤을 해 보겠다고 신청한 지 불과 한두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계산이 머릿속에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읽기 쉬운 책을 읽으면 되지, 그래 맞아!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읽으려다가는 100% 실패할 거 같고, 그렇다면 분야나 장르가 편중이 돼도 일단 내가 좋아하는 내용의 책을 읽어서 완주해 보자 하는 마음으로 판타지 소설을 신나게 읽어 보자 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공지사항을 찾아보니 판타지 소설은 인정이 안 된다고 나와 있었다. 아니 이거 이러면 완전 나가리잖아! 그래서 다시 포기하려 했다.



 순간 꿈틀 하는 반골기질이 올라왔다. 아니 저기요, 책을 읽는 게 목적인 이벤트라면서요. 판타지 소설은 책 아닙니까? 만화책도 아닌데 100% 활자로 되어 있는 책인데 다른 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 세상에 없는 이야기지만 결국 사람이야기인데, 그렇게 따지면 소설도 다 없는 이야기 개연성이라는 명목하게 있을 법하게 그럴듯하게 지어낸 건데 그래서 크게 보면 그런 소설도 다 판타지인데, 왜! 명확하게 판타지라는 장르를 걸고 나온 소설은 인정이 안 되는 건가요? 웃긴 건 당신들도 저 유명한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은 영미문학이라고 소개하잖아요. 그건 유명하니까 판타지지만 문학 카테고리에 넣어 주고 다른 판타지는 유명하지 않으니 무시하고 뭐 그런 겁니까? 하고 홈페이지 내의 묻고 답하기를 통해 따져 물었다. 다행히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닌지 많은 문의가 있었던 거 같다. 결국 판타지 소설도 인정이 됐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뒤이어 그래도 그 많은 양의 책을 읽는 건 역시 힘든데 하는 생각도 바로 따라붙었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이거 해 주면 저거 해주길 바라고 저거 해주면 이거 해 주길 바란다. 여하튼 나름 내가 독서 마라톤을 시작할 수 있는 바탕은 마련이 됐다. 이제 읽기만 하면 되는데 머릿속은 다시 한번 꼼수를 찾는 계산을 시작했다. 책을 이만큼 읽었다는 인증을 다 읽은 책의 감상문을 쓰면 그 책의 페이지 전체를 거리로 환산해 주는 식이었는데 이거 가만히 보니 대충 가라로 감상문만 쓰면 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감상문 인정 기준이 최소 100자였기 때문이다. 100자면 몇 줄만 쓰면 되는 건데 책을 빌리고 대충 앞 뒤 평 훑어보고 인터넷상에 떠도는 서평이나 리뷰 한 두어 개 읽어본 뒤에 내용 정리하고 순간 생각나는 내 생각을 한두 줄 첨부하면 책을 전혀 읽지 않고 100자 정도의 감상문은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런 식으로 하면 이틀에 한 권이 문제가 아니라 매일 한 권 아니 두세 권도 읽었다고 감상문을 써낼 수 있을 거 같았다.



 고민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얼마가지 않아 그렇게 할 거면 그냥 하지 말자하고 바로 결정을 했다. 나름 책 좀 읽어 보자고 하는 건데 뭐 하는 짓거리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이전부터 읽어보자고 다짐만 하다 말았던 해리포터부터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해리포터는 쉽게 잘 읽혔다. 아무래도 아이들까지 고려한 책이라 그런 가 어렵지 않게 술술 잘 읽혔다. 읽으면서 오래간만에 영화도 전부 다시 다 봤다. 영화가 한참 개봉하던 20대 중후반과 30대 초반 생각도 나고 좋았다. 이어서 ‘헝거 게임’도 읽고 도서관에 왔다 갔다 하면서 눈에 걸리는 다른 분야나 장르의 책도 한 두어 권씩 읽었다. 지금은 내용이 일도 기억나지 않는 ‘파우스트’도 읽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다른 판타지를 읽어 보려다 해리포터만큼 속도가 나지 않을 거 같아 고민하다 역사를 만화로 풀어낸 책은 또 인정이 된다고 해서 고려사, 조선사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다룬 다양한 역사만화도 읽었다. 마지막은 역시 읽어 봐야지 했던 ‘미생’을 읽었다. 만화책은 기본적으로 인정이 안 되는데 앞에서 이야기한 역사만화나 두루 읽혀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한 만화는 또 인정이 됐다. 대표적인 게 윤태호 작가의 미생이었고 강풀 작가의 작품도 인정이 됐는데 미생까지 읽고 나니 독서 마라톤 일정도 끝났고 내가 채워야 할 양도 다 채워서 강풀 작가의 작품은 읽지 않았다. 보다 자세한 도서 목록은 이전에 다른 글에서 자세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읽은 장르가 편중이 됐고 만화책도 많이 읽어서 스스로 조금 찔렸는지 감상문은 참 열심히 썼다. 잘 썼다고 할 수는 없는 100자 정도만 쓰면 되는 감상문을 의도하진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1,000자 내외로 꽉꽉 채워 썼다. 하나의 큰 흐름으로 이어지는 해리포터 같은 책을 읽으면서 매 권 다른 감상문을 쓴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5개월이란 시간 동안 총 64권의 책을 읽었다. 상대적으로 읽기 쉬운 판타지 장르와(해리포터만 23권인가 그랬다.) 역사 만화에 쏠렸지만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 정도 읽었으면 어느 정도 독서 습관도 잡혔겠다 싶어 이후엔 조금 여유 있게 일주일에 한 권 정도는 꾸준히 읽어봐야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다. 사람은 아니 나란 인간은! 습관을 잡아 나가는 게 참 힘든 인간인 거 같다. 3개월을, 5개월을 아니 1년을 무언 갈 꾸준히 했어도 손을 놓는 순간 다시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그래서 한편으로 담배를 배우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담배를 배웠다면 대단한 꼴초가 됐을 거고 몇 개월 끊었다가 다시 피고 하는 걸 반복했을 거다. 담배를 한 번 피워 볼까 하고 흔들렸던 하지만 다 잡았던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의 나, 칭찬해~



 독서 마라톤 이벤트가 9월 30일에 끝났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런저런 책을 들춰 보다 겨우 한 권을 읽었다. 그마저도 역시 판타지다. ㅋㅋㅋ. 더불어 적지 않은 권의 책을 읽었고 감상문도 열심히 쓰고 해서 뭔 시상 하나 받을까 기대도 했다. 처음부터 완주자를 대상으로 시상을 한다는 공지가 있었다. 상을 받는다고 대단한 무언 갈 받는 건 아니었는데 이왕 하는 거 시상을 받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더 감상문을 열심히 쓰기도 했다. 결과는 단순한 ‘우수’ 완주자였다. 전체 참여자 중에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하고 그중에 나름 괜찮은 결과를 보인 사람들을 우수완주자로 뽑고 그 위에 장려상, 우수상 그리고 최우수상을 뽑은 거 같다. 난 그중에 장려상 밑에 있는 우수완주자가 됐다.



 아쉬웠다. 냉정하게 최우수상은 못 받을 거 같았는데 우수상이나 장려상은 솔직히 기대했다. 이렇게 감상문을 열심히 썼는데! 나보다 더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고 더 빨리 읽고(실제로 같은 거리를 신청한 사람 중에 2개월 8일 만에 끝낸 사람이 있다. 계산을 해 보면 매일 300페이지 정도의 책을 한 권씩 읽었다는 이야긴데...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더 괜찮은 감상문을 쓴 사람들이 있었겠구나 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이쯤 되면 참여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말이 종종 나오는데 이왕 하는 거 잘하면 좋지 않은가? 해서 상도 타고 뭐도 타면 누이 좋고 매부도 좋은 거 아닌가? 참여하는데 의의를 두는 순수한 사람은 아니라서 영 아쉬웠다. 그래도 우수완주자라고 11월경에 기념품은 배부해준다고 한다. 뭐를 주려나? 어떤 콩고물 일려나 기대해 본다. 도서관 이름 박은 독서대 하나 주겠지 뭐!


                   

독서 마라톤 1편, 실패할 마라톤. https://brunch.co.kr/@tharos/511

독서 마라톤2편, 가을이 오면. https://brunch.co.kr/@tharos/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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