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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 Mar 30. 2024

퇴근하는데 용기까지 필요해?

  ***

  서 과장님,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점심시간을 약 10분 앞두고 부서장의 호출이 들어왔다.


  이번엔 부서장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나 있으려나?


  부서이동을 하고 나서 나는 15년이 넘는 내 커리어를 일시에 삭제당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새로 맡은 일은 이전까지 해왔던 일과는 전혀 다른 미궁과도 같았다.




  ***

  - 부서장님이 왜 부른 거야? 뭐라셔?


  윤 과장은 내가 부서장 방을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 과장의 얼굴을 보자 그제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 일 얘기지, 뭐. 숙제 또 하나 받았다.


  - 그걸 굳이 점심시간 직전에 얘기해야 하나? 이해가 안 돼.


  - 갑자기 생각났나 보지.


  - 아니야. 지난번엔 나한테도 그랬거든. 급하지도 않은 일인데 굳이 퇴근 전에 나를 부르더라고. 다음 날 말해도 되는걸 굳이.


  - 그렇지? 좀 별로긴 한 거 같아.


  - 맞아. 그 인간 일부러 그러는 거라니까.




  ***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윤 과장의 말이었다. 하지만 최근 나는 그의 말에 신빙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서장은 정말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는 악취미가 있는 것일까?


  마찬가지로 윤 과장과 함께 겪은 일이다. 업무협조할 일이 있어 그와 함께 탕비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부서장이 열린 탕비실 문 밖을 지나가며 우리 쪽을 슬쩍 쳐다보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듯했고, 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넘겼다.


  그로부터 약 5분쯤 뒤, 부서장이 서류철 하나를 들고 탕비실로 들어오는 것이다.


  -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밌게 하세요?


  그는 우리 둘의 얼굴과 테이블 위의 서류들을 살피며 물었다.


  - 얼마 전에 지시하신 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 아, 그렇군요? 그것도 중요한데 이것부터 봐주셔야 할 것 같아요.


  - 알겠습니다.


  나는 가슴에 또 하나의 무거운 돌을 얹은 느낌이 들었다.


  - 부서장님, 곧 퇴근 시간인데 굳이 지금 그런 말씀을 하고 그러세요.


  넉살 좋은 윤 과장이 웃음으로 무장한 채 정곡을 찔렀다. 평소 부서장과 친분이 두터웠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는 잠시 멋쩍은 표정이 되더니 이내 <나도 지금 막 지시받아서 그래요.>라고 둘러대며 자리를 떴다.


  - 의도적으로 그러는 거 맞는 거 같지?


  윤 과장이 씩 웃으며 물었고, 나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 거의 확실한 것 같다.




  ***

  결정적으로 내가 심증을 굳힌 계기는 바로 어제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금요일 퇴근을 앞둔 무렵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퇴근 준비에 바빴고, 나 역시 정리를 시작하려 할 때였다.


  - 서 과장님, 메일 보셨나요?


  부서장이었다.


  - 아뇨.


  내 대답은 무뚝뚝했다. 다들 퇴근하고 있는데, 그것도 주말 시작을 앞두고 또 이러는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업무를 모르는 내가 답답해서 그렇겠지>라는 생각으로 뭐든 죄송해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태도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왔는데 일 모르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


  그렇다고 전임자나 인수인계서가 있어서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

  퇴근합시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부서장은 그렇게 사무실을 떠났고, 나는 그가 보냈다던 메일함에 들어가 보았다. 메일을 보낸 시각을 확인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불과 2분 전에 보내놓고 확인을 했냐고?


  내가 오매불망 부서장의 메일만 기다리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괴팍한 성격에 대해선 이제 더는 의심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메일에는 업무작성 양식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고, <열기> 버튼을 누르자 여러 페이지로 구성된 문서가 모니터 화면에 펼쳐졌다. 항목명만 쓰여 있고, 내용에는 공란이 한가득. 그 내용을 채우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휴,


  되든 안 되든 야근각인가.




  ***

  - 서 과장님, 퇴근 안 하세요?


  옆자리 최 과장이었다. 사람은 참 좋은데 요즘 무슨 문제가 있는지 부서장 방에 자주 불려 들어간다. 오늘도 한참 동안 부서장에게 시달리는 것 봤고 말이다. 그래도 퇴근 후 탁구만 칠 수 있다면 만사 오케이인 모양이었다.


  - 응, 가봐야지. 최 과장은 아까 부서장한테 많이 깨지던데 다 해결됐어?


  - 아뇨.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최 과장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부서장 지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 하하, 야근 안 해도 되겠어?


  - 야근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쉬고 나와서 해봐야죠.


  

  그래, 당신 말이 정답이다. 남아 있는다고 해서 뭐가 될 리가 없잖아.


  새삼 부서장에 대한 반감이 일었다. 내가 잘못한 건 없다. 새로 와서 일을 모르는 건 당연하고, 일은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퇴근 직전에만 업무 지시를 하는 부서장이 이상한 것이다.


  그래,
나는 잘못이 없다.
퇴근하겠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주말을 잘 즐기고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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