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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 Mar 16. 2024

회사에는 천사가 없다.

   01.


  신입 시절이었다.


  어느 조직이나 그렇겠지만 사람이 모이면 그중 불편한 사람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신입 때에는 모두가 불편하다. 사람뿐만 아니라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까지.



© kpzhnv, 출처 Unsplash


  아마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안 그래도 어려운데 처음이라 서툴고, 그래서 더 어렵고.


  내가 입사 후 처음으로 발령받은 곳은 업무가 과중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일은 힘들어도 그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끈끈한 정 같은 게 있기는 개뿔.




  02.


  우리 부서는 타 부서에 비해 분위기가 엄했다. 그중 내가 있던 파트는 유독 군기가 센 편이었다. 다행히 새로운 얼굴이 왔다고 살갑게 다가와주는 사람도 있었다.


  - 일은 잘 돼?


  B 선배는 그렇게 먼저 다가와서 어려운 건 없냐고 물어줬고, 점심 식사를 사주었다. 나와 다른 파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입사 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얻어먹은 식사였다.


  당시 점심시간이 되면 부서원들은 하나 둘 소리 없이 사라졌고, 어느새 돌아보면 사무실에는 나 혼자만 남아 있기 일쑤였다. 발령받은 첫날부터 말이다.


© vardarious, 출처 Unsplash


  밥이야 어떻게 먹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구내식당에 가서 보이는 다른 동기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사수가 살뜰히 챙기는 다른 동기들과 비교가 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환영 회식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러니 나에게는 B 선배가 천사처럼 보일 수밖에.




  03.


  - 저희 파트는 분위기가 딱딱한 것 같아요. 일은 배우면 되는데 그게 좀...


  - 맞아, 맞아. 거기 정 과장이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잖아. 개인주의도 그런 개인주의가 없어요. 나도 그 선배랑은 어려워.


  - 정 과장님도 그렇고, 이 대리님도 성격이 보통 아니신 거 같더라고요.


  - 이 대리 대단하지. 쌈닭이야. 걔는 직급이고 뭐고 없어요. 아니다 싶으면 그냥 들이박는다니까.


  - 어째 저희 파트에는 쉬운 분이 없네요. 하하.


  - 지내다 보면 다 똑같지, 뭐. 참, 너도 이거 먹어볼래? 난 이거 먹으니까 완전히 달라졌어.


  식사를 마친 B 선배는 영양제로 보이는 알약들을 보여주었다. 그걸 입에 털어 넣고선 <오, 벌써 힘이 나는 걸!> 하며 오버를 하더니 나에게도 그걸 내밀었다.


  - 하하. 저는 괜찮습니다.


  - 젊었을 때부터 관리해야 해.


  - 혼자 끼니 챙기기도 어려운데 영양제는 귀찮아서요.


  - 그러다 몸 망치는데... 아무튼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04.


  그나마 B 선배 밖에 없었다. 동기 말고 내 말상대가 되어주는 사람 말이다. 그런 B 선배는 항상 바빴다. 시시때때로 급한 일이 있는 듯 달려와서는 이런 부탁을 했다.


  - 미안한데 차 좀 잠깐 빌려줄래?


  - 또요? 차 아직 못 고치셨어요?


  - 그래, 미치겠다. 좀 빌려주라.


  

  그리고 흡연구역에서 눈만 마주치면 말했다. (그때는 내가 담배를 끊지 않았었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 담배 하나 빌려주라. 출근할 때 산다는 걸 깜빡했네.


  - 편의점에서 사 오시면 되죠.



  흡연구역에서 3분 거리에 편의점이 있었다.



  - 이럴래?


  우리(!)는 이젠 그런 농담도 편하게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선배가 하루에도 수차례 내 담배를 빌려가는 바람에 매일 새 담배를 사야 하는 것 따위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때 내겐 아직 어색하고 낯선 환경에서 내가 회사에서도 누군가와 편하게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점점 그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선배가 내 물건들을 빌려달라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주로 담배와 자동차였다. 이젠 내 물건을 가져다 쓰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05.


  나쁜 것은 그 선배도 형편이 어려운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차를 끌고 출근했으면서도 남의 차를 빌려달라고 하고, 담배 살 돈이 있으면서도 담배를 빌려 피웠다. 알고 보니 B 선배는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구걸을 하고 다니곤 했다.


  오랫동안 그를 겪어본 사람들은 이미 손절을 한 상태였다. 그래서 주로 나 같은 신입들을 신규고객(?)으로 유치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리에서 떨어진 내가 적격이었겠지.



© kommumikation, 출처 Unsplash


  - 너 이 영양제 사라. 내가 매일 먹는 거 알지? 이거 정말 좋아. 그래서 추천하는 거야.


  하루는 대뜸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선배는 부업으로 다단계 영업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종 나와 함께 점심을 먹을 때면 입에 털어 넣던 그 약이었다.


  그는 내가 정말 구매를 해줄 거라 믿었던 걸까?

  그렇다면 나를 얼마나 호구로 봤다는 걸까?


  나의 완곡한 거절에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선배가 말하는데 후배가 무례하다, 거절은 그렇다 쳐도 말을 왜 그 따위로 하느냐는 식이었는데, 그에게 남은 일말의 연민도 사라진 것은 그때였던 것 같다.


  이후 그와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소원해졌고, 각자 부서 이동을 하며 물리적으로도 분리되게 되었다.




  06.


  저는 새로운 인생을 살러 갑니다.
여러분들도 도전하는 삶을 사세요!

  회사를 다니면서도 늘 부업에 더 열심히였던 그였다. 그랬던 만큼 그에 대한 사내 평판이 개차반이었음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그가 마침내 퇴직을 한다며 인사를 돌았다. 이른 나이의 명예퇴직이었고, 그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전해 듣기로는 원두 유통사업과 연계한 카페를 차릴 거라고 했는데, 고개가 갸웃해졌다. 회사 업무도 엉망이었던 사람이 다른 일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그는 호기롭게 회사를 떠났고, 공교롭게도 퇴직하자마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코로나라는 유례없는 재앙이었다. 최근 지인으로부터 그가 쫄딱 망해서 돈을 빌리러 다닌다느니, 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걸 봤다느니 하는 소문을 들었다.


  아마 뭘 하든 잘 안 됐을 것이다.



© lephunghia, 출처 Unsplash


  결국 B 선배는 나의 천사가 아니었고, 현실에는 천사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가 꿈을 찾아 떠난 곳도 천국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만약 천국이었다 해도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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