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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 Apr 15. 2024

일을 완전히 망칠 각오로 출근합니다.

   ***

난 잘하고 있다.
다 잘 될 거야!

  작년 이맘때, 출근길에서 매일 그런 주문(?)을 외웠었다. 주차장에서 차에 시동을 걸면서도 그랬고, 운전을 하다 신호에 걸릴 때에도 불현듯 외치곤 했다. 마치 잊고 나온 물건이 생각난 것처럼.



  - 잘 될 거야. 문제없어.



  웹서핑을 하다가 <내가 믿는 대로 말을 하고, 그렇게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라는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언젠가부터 SNS에서 많이 보이기 시작한 <긍정확언>이라는 것이었다.




  ***


  물론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것에조차 기대고 싶었다.



  - 지난번에 용하다는 도령 있다고 하지 않았어?


  - 도령?



  아내는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 그 왜, 당신 얼굴 보자마자 살림 솜씨 없다고 했다던.



  아내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다시금 분노에 찬 어조로 말했다.



  - 아, 그 열받게 하는 도령? 신기하긴 했지. 그런데 왜?


  - 나도 한 번 가볼까?



  내가 아내에게 그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평소 점이나 타로 같은 미신에 심취해 있는 아내를 비웃었던 나였는데 말이다.


  그만큼 나는 정신적으로 코너에 몰린 상태였고,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종국에는 도망치듯 휴직을 나가게 되었으니까.




  ***

  

왜 잘해야만 돼?
좀 못하면 어때?

  오랜만에 술자리에서 만난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복직을 하고 난 뒤에도 다소 의기소침했고 한편으로는 멋쩍었다. 물론 겉으로는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겁이 났다.


  또다시 고꾸라질까 봐.



  - 쉬고 왔으니까 잘해봐야죠. 좀 더 강해지려고 노력 중입니다.



  나는 선배 앞에서 무슨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그렇게 말했다.



  - 이 봐, 뭘 그렇게 노력을 하려고 그러나? 당신보다 못하면서 노력도 안 하는 사람 정말 많아.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잘만 출근해. 자신만만하게 말이야.


  - 선배님은 부서장이라 그렇게 말 하실 수 있는 거 아닐까요?


  - 에이, 그런 소리 말아. 다 똑같아.


  


  ***


  선배는 부서장의 위치에 있었다. 나는 그런 선배가 부러웠다. 최소한 부서장 때문에 괴로울 일은 없을 것 아닌가. 선배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 그런 친구들이 가져오는 보고서? 그거 다 쓰레기야. 그러면서도 얼마나 당당한 줄 알아?



  술을 못 마시는 선배는 술 대신 사이다를 쭉 들이켰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 애쓰지 마. 당신이 못해도 회사는 굴러가게 돼있어. 그게 아니면 이 조직이 잘못 설계된 거지.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야. 못난 인간들도 얼마나 당당하게 사는데, 왜 잘하는 사람들은 더 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사는지.

  

  그래, 나는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게 잘 되어 왔었다. 물론 힘에 부칠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쟤는 뭐 시키면 잘하잖아.>



  <일 시킬 사람이 안 보여. 이 부서에서 일한다는 사람은 서 과장 밖에 없다니까.>



  그런 말들이 참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기억 저편의 어딘가로 사라진 일들이 된 것 같았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선배가 했던 말들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래, 그러고 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회사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일과시간에 하는 일이라곤 다른 사무실에 놀러 가거나 담배 피우러 다니는 게 전부인 사람들. 그렇게 업무 시간을 보내놓고, 매일 같이 야근을 올려놓기 일쑤인 사람들. 그들은 느지막이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 휴대폰만 만지며 시간 죽이기만 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래, 잘하지 못하면 좀 어때?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내가 그렇게 못하는 것도 아니라고.



  나는 휴직을 마치고 다시 출근을 하게 되면서 확언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내용은 그전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오늘 아마 제대로 하지 못할 거야.
일을 완전히 망쳐버릴 거야.
    


  사람이 어떻게 잘 하기만 하겠어.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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