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넘게 회사생활을 하며 많은 부서장을 만나봤다. 다혈질인 사람, 예민한 사람, 감정기복 큰 사람, 일에 미친 사람, 무능력한 사람 등등.
물론 그들 중엔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부서장은 운이 억세게 좋을 때에나 만날 수 있는 법이다.
그래, 결점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문제는 그런 결점을 가진 사람이 권력이 있는 자리에 올라갔을 때이다.
지금의 부서장은 기분파이고, 업무에 있어서도 자기 내키는 대로 일을 시키는 사람이다. 만약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마침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시켜 버린다. 맡은 업무영역이 전혀 다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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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서 과장 차례인가 봐.
영문모를 업무지시를 받은 내게 동료들은 그렇게 말했다. 무슨 뜻이지? 내 차례라니. 사정을 들어보니 이미 다른 부서원들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당신은 만능이 되어야 한다. 그 직책이 원래 그런 자리다.
지금의 부서에 발령받아 왔을 때, 부서장은 그런 말을 하며 온갖 일을 시킨다는 것.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저항하고, 또 누군가는 다른 부서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마땅히 그 역할을 할 사람이 없는 시기에 내가 이 부서로 발령받아 온 것이다. 이렇게 좋은 먹잇감이 어딨을까. 나 역시 출근 첫날, 부서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그런 얘길 들었다.
<서 과장님은 모든 일에 관련돼 있다고 보면 됩니다. 아셨죠?>
지금에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아, 그냥 아무 일이나 시키겠다는 뜻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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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과장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 거예요?
옆 자리 김 대리가 하는 말이다. 김 대리야, 나도 궁금하다. 내가 무슨 일 하는 사람인지. 부서장이 이걸 시키면 이 일을 하는 사람이고, 저 일을 시키면 저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그건 실로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출근하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 말이다.
기본 업무 파악도 전혀 되지 않았는데 과장은 자꾸 불러젖히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출장을 가라 하고, 워크숍에 참석하라 하고, 회의를 보내기도 했다. 하나 같이 내 본연의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결국 나는 작년 휴직했을 당시에 다녔던 심리상담센터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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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번에 복직을 하면서 목표가 있었어요. <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요. 그래서 부서장의 불합리한 지시에 저항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쉽지가 않더군요.
- 당연히 쉽지 않죠. 상급자의 지시인데 얼마나 어렵습니까.
상담사는 어떻게 그런 부서장들만 만나게 되었냐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 더 선을 넘는다면 부서장보다 높은 라인에 민원을 넣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의 부서장은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사람이거든요.
- 혹시 그분에게 직접 얘기를 해본 적도 있나요?
- 초창기에 정말 아니다 싶은 일은 얘기한 적이 있어요. 다행히 그 업무에서는 제외되었지만 다른 일들은 여전히 쉽게 쉽게 시키시더군요.
- 음, 지레짐작으로 일을 더 크게 만들려고 하니 서툰 님의 심적 부담도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한 얘기를 들어보면 그 부서장도 어느 정도의 눈치는 있는 사람 같아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에게 지금 저에게 해주신 얘기들을 털어놓는 거예요. 제 생각엔 아마 들어주실 것 같습니다. 다음번에 선을 넘었다 싶을 땐 용기를 내서 말해보세요.
- 사실 어느 부서나 자기가 맡은 일만 하지는 않아요. 가끔 내 일이 아니지만 서로 도우며 가는 부분도 많이 있죠. 하지만 이렇게 막 시키지는 않거든요.
- 그럴 거예요.
- 지금은 과장이 시키는 일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정도는 해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일일이 대응을 해야 하는 것인지가 애매해요.
- 제가 그 기준을 말씀드릴게요.
***
기준은 바로 서툰 님의 기분이에요.
- ...?
처음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하라는 책도 있지 않은가. 읽어보진 않았지만 사회생활하면서 기분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 아닐까? 상담사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 과장 지시를 받을 당시에는 몰랐는데 업무내용을 살펴보니 화가 날 때가 있죠?
- 맞습니다.
- 그럼 그것은 부당한 지시라는 뜻이에요. 서툰 님이 해야 할 일이 아닌 겁니다. 그럴 때 말씀하시면 됩니다.
상담사는 단호하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래, 내 기분이 기준이다. 그러자 나는 용기가 샘솟는 기분이 들었다.
-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해볼게요.
부서장이 자기 기분대로 살듯, 나도 내 기분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길이며, 무엇보다 내 기분은 결코 틀리지 않은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