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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May 16. 2023

헬로 칭챙총

무례함과 관심 그 사이 




나의 ≪삼 남매와 남아공 서바이벌≫에 인종차별에 대해서 기록했다. 

정말 중국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아시안을 대하는 태도에 말이다. 

1장의 아홉 번째 꼭지에 실린 '니하오 밖에 몰라?' 챕터다.  


처음 남아공에 왔을 때, 남아공에는 흑인만 살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생각보다 백인이 많이 보였다. 

중국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무척 많이 마주치는 건 아니지만, 남아공에는 차이나 타운도 있고, 차이니즈 스토어도 곳곳에 많다. 저렴한데 잡화물이 많아서 유용하게 드나드는 공간이다.  왜 그리 남아공에 중국인들이 많은고 했더니, 남아공도 중국 무역이 안되면 망할지도 모르는 나라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중국에서 들여오는 물건 및 교류, 그리고 모정의 약속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까지 타고 들어가면 이유야 수백 가지가 될 거다. 


무튼, 길에서 많지도 않은 한국인을 마주쳐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면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혹은 일본인인지 구분을 못할 때가 있다. 나중에 지인과 이야기하다가 안 사실인데, 나를 처음 봤을 때 혹시 북한사람인가 했단다. 이건 또 무슨 호랑말코 같은 말인가. 당시 그 말을 들었을 때 '북한 = 촌스러움'이라는 공식이 내게 있었는지 살짝 기분 나쁘려 했다. 

아니! 내가 뭐! 내가 어디가 어때서!라고 강하게 받아치고 싶었다. 

  

처음에는 무조건 '니하오!'라고 부르는 사람, 특히 흑인들이 그렇게 부르는데, 그렇게 부르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몹시 불쾌했다. 왜 어디서 왔냐고 묻지 않고 바로 니하오로 인사할까에 대한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그런데 또 반대로 생각해 보니, 이 나라에 사는 아시안이라고 하면 중국사람이 대부분이니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한편으론 이해가 됐다. 


매주 주 2회 흑인 마을에 간다. 그럼 차가 들어가는 입구부터 우리를 아는 어린이들, 즉,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 화요 키즈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아이들이 무슨 응원 비슷한 말을 하면서 반긴다. 

마치 "우리 팀! 이겨라!"의 운율로 학교 운동회에서 응원했던 소리와 비슷하다. 그들 말로 하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일단 어서 오라며 반기는 인사인건 알겠다. 나중에 남편과 유추해 보건대, OOO 차이나!라고 하는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수 십 번, 수 백번을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알려줘도 그들에겐 그냥 중국인이다. 


그냥 그러려니 하다가도 그 어린 꼬맹이들 입에서 "칭챙총"이라는 말로 인사를 하거나 무례하게 까부는 날에는 손모가지를 딱 잡고 '너 일루 와! 내가 몇 번을 말했어 나 중국사람 아니라고!'를 말하고 싶어 진다. 뼛속까지 대한민국의 시민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에 대한, 나의 조국에 대한 사랑이 깊어서라고 말하기는 뭐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의 정체성은 대한민국 사람인 탓이다. 아무튼 그놈의 칭챙총은 너무 듣기 싫다. 칭챙총으로 안 끝난다. 쿵후 자세와 합장하며 인사하는 자세는 어디서 보고 배웠는지 매번 그렇게 제스처를 취하며 장난을 건다. 한국에 대해서 알려줘도 그때뿐이다. 


요즘에는 고학년 아이들은 와서 한국어를 묻는다. 따라 하기도 하고, 궁금한 말을 어떻게 한국어로 말하는지 묻기도 한다. 사랑해. 싫어해. 일루 와. 너 이름이 뭐니?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등의 인사말과 감정표현을 묻곤 한다. 그럼 나에게 자기네 언어를 알려주면서 따라 해보라고 한다. 중학교 1학년 정도 되는 여자아이들 무리가 주일마다 나를 둘러싸고 자기들 언어를 가르친다. 세페디어, 줄루어는 그 아이들이 쓰는 흑인 부족어다. 내가 그 어려운 발음을 따라서 말하면 박장대소하고 웃는다. 잘하면 안 웃는데 꼭 한 번에 말하는 법이 없다. '흐' 자가 들어가는 발음들이 섞여서 꽤나 어렵다. 역시 영어도 그렇지만 외국어는 혀를 쓰는 발음이 많다.


지난주에는 초등학교 5학년쯤 되는 여자아이가 예배실 문 앞에 서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일이니? 왜 보는 거야?" 하고 묻자, 아무런 대답 없이 들고 있던 긴 장대 막대를 바닥에 툭툭 치고는 다른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쓱 만졌다. 그러곤 자기 손으로 왔다 갔다 머릿결의 찰랑거림을 느끼고 싶었다는 듯 머리를 쳐냈다. 순간 몹시 불쾌했다. 


"STOP IT! DON'T TOUCH ME!" 


명확하고 낮은 톤의 목소리로 눈을 마주치며 말하자 눈을 돌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아이는 그냥 자기에게는 없는 생머리가 궁금해서 만져보고 싶었을 거다. 나도 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을 그냥 묵인하면 몇 번이고 반복하는 걸 경험해서 이제는 그냥 안 둔다. 처음에는 그냥 웃고 넘기기도 했는데 그렇게 하니 다른 애가 와서 또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와서 안기는 아이들도 있다. 그럼 안아 준다. 애정 표현 하는 아이들이 많다. 그렇게 오는 아이들은 예쁘다. 그런데 뭐 다루듯 말 그대로 '터치'(이 말 말고는 적절한 표현이 없다)하는 아이들은 그냥 안 둔다. 꼭 한 마디 보탠다. 


너 지금 되게 무례하다. 




영어로도 100%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빈민촌 아이들은 영어를 배울 기회가 적어서 그런 이유도 있지만, 환경 자체가 부족언어를 더 많이 쓰는 탓이다. 답답함의 극치를 넘어서는 때도 있지만 대부분 어영부영이라도 의사가 통한다. 

이럴 때면 영어가 있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지 모른다. 


간혹 알려주지 않으면 모르는 게 있다. 

이건 어른도 아이도 마찬가지다. 흑인들에게만 국한되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아니다. 나라와 민족을 막론하고 모르면 알려줘야 한다. 그렇게 한 번만 짚어줘도 그게 잘 못 되었는지 알고 다시 반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뭐든 모르면 배워야 한다. 

관심과 무례함이 무엇인지 구분을 못한다면 구분할 수 있도록 알려주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교사이자 지도자의 입자에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관심과 무례함 사이에 서있다면, 

나는 다정함과 단호함 사이에 서야 한다. 


요즘 아프리카 청소년들 문화와 사회의 참담한 현실을 직시하는 중이다. 

오늘도 같이 동역하는 사모님과 청소년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유행 혹은 전통적인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의 미래를 내가 어떻게 책임져 줄 수는 없다. 그럴 재간도 능력도 없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고민해 본다. 


나와 내 가족의  3년 후, 5년 후, 10년 후를 그려보면서 

내가 무엇을 하면 이들의 3년 후, 5년 후가 달라질 수 있을까도 고민해 보게 됐다. 


고민은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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