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
TV를 즐겨보지 않게 된 것이 아마 이삼 년은 된 것 같다. 뉴스가 가장 재미있다고 느껴지면 나이가 들은 거라는데 내가 그랬다. 드라마나 쇼 프로그램에 별로 구미가 당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8시, 9시 정각에 맞춰 등장하는 낭랑한 목소리의 아나운서 멘트가 청각을 자극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대화 주제에 드라마가 등장했다. 여성 시청자가 주 고객인 드라마가 남녀를 불문하고 직장인의 일상 대화 속 주제 또는 주말 시간 몰아보기 등으로 스트레스 해소용이 되었다고 한다.
조금 일찍 퇴근한 목요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채널을 돌리다가 한창 인기몰이 중이라는 드라마를 찾았다. 의사들의 생활을 다루고 있었다.
아기를 간절히 원하는 부부가 있다. 하지만 산모의 상태가 좋지 않다. 결국 23주를 버틴 아기는 세상 구경을 하지 못했다. 산모를 담당했던 의사는 안타까운 마음이었지만 누구보다 상처를 입었을 산모에게 긴 메시지를 보낸다. 그중 한 문장이 드라마 속에 비쳤다.
‘Bad things at times do happen to good people’
원래 이 문장은 산부인과 전공의 교과서 첫 장에 쓰인 것을 작가가 놓치지 않고 인용한 것이었다. 우리말 해석은‘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였다.
이 문장을 보자 오늘 낮에 만났던 김밥집 사장님이 떠올랐다. 며칠 전 시청 게시판에 ‘지역 집단이기주의’라는 제목으로 긴 글이 올라왔다. 내가 속한 동네 이야기였다. 부끄러운 면모가 드러나는 이야기였지만 참 잘 쓴 글이었다. 실제 경험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쓸 수 없는 설움과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자초지종이 궁금했고 실제 살펴보는 게 나의 일이기도 했다.
점심 장사를 끝냈을 오후 3시경 슬슬 걸어서 가게로 갔다. 글의 내용처럼 쓰레기 무단투기 금지 안내판이 있었지만 주변은 아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출입구에 굵은 주름치마를 곧게 자른 모양의 비닐커튼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너무 촘촘해서 입구를 찾지 못해 비닐막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으니 주인인 듯한 여성분이 안쪽에서 열어주었다.
파리나 날벌레의 드나듦을 방지하려고 했다는데 사람까지도 들어오기 어려웠다. 가게는 다섯 평 남짓 아주 작았다. 주인의 취미생활인지 여기저기 마른 꽃이 벽에 걸려있고 여러 종류의 답서스가 작은 화병에 꽂혀 있다.
때가 지나서인지 손님은 없었다. 방문 이유를 밝히고 자리에 앉았다. 주인장은 단정한 쇼트커트에 큰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마스크에 가려 연령대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목소리나 말투로 보아 40대 초반 같았다. 뜬금없는 방문에 잠시 당황한 듯했던 주인은 대뜸 왜 왔냐며 지극히 방어적인 자세로 물었다. 당연한 질문이라 홈페이지 게시판을 보았노라고 했다. 침묵이 흘렀다.
어색해지는 것 같아 벽에 걸린 마른 꽃을 가리켰다. 서울에서 플로리스트 생활을 오래 했다고 했다.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지만 어려움이 닥쳤다. 오랜 서울생활을 접고 연고지도 아닌 지방 소도시로 내려오기까지 말 못 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서울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게시판 글까지 이어졌다. 억눌린 감정이 올라오는 듯했다. 냉정하고 차분했던 말투가 거칠어지더니 점점 사건의 중심부에 다가갈수록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성실하고 청결한 사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파산,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조용하고 한가로워 보이는 지방의 한 귀퉁이, 읍내 한복판에 자리를 잡았다. 경험이 없던 터라 원래 음식점을 하던 자리 그대로 인수받았고 이사 오기 전 인터넷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 동네는 유서 깊고 오래된 원도심이었다. 근처에 관공서도 있었고 단독주택도 꽤 많았다.
서울의 한 귀퉁이에 비해 보잘것없는 상권이었지만 큰 욕심 없이 성실하게 일하면 자립할 수 있을 것 같아 큰 마음먹고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가게를 열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시작되었고 지난 일 년 동안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시간이 흘렀다.
주인이 매력으로 생각했던 오래된 원도심, 꽤 많은 주택가가 오히려 불편함의 배경이었다. 주택가 주민들의 평균 연령은 거의 육십을 넘긴 분들이며 짧게는 십 년, 길게는 팔십여 년을 한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수개월만에 자르고 세우고 없애고 칸을 쌓는 서울이라는 동네와 다르게 수십 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외형만 변화가 없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에도 변함이 없었다.
문제의 발단은 쓰레기 처리였다. 가게 출입문 왼쪽이 이쪽 구간 쓰레기 집합 장소였다. 음식점 바로 옆이고 위생을 생각하면 눈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그것까지는 주인도 받아들이기로 하고 대신에 더욱더 가게 앞 청소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는 종량제 봉투 사용, 음식물 쓰레기 수거방식을 동네 사람들은 지키고 있지 않았다. 이것저것 마구 섞여 담은 쓰레기를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아무 때나 던져 놓았다. 밤마다 고양이나 쥐가 들쑤셔놓은 비닐봉지는 다음날 아침 고약한 냄새와 지구 상에 있는 모든 파리들까지 초대해 놓고 있었다.
청소를 하는 것도 행정기관에서 치워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참다못해 주인장은 쓰레기를 버리는 주민들을 지켜보았다가 종량제 봉투 사용을 요구했던 것이다. 서로를 배려해 주겠지, 정말 많지는 않지만 1퍼센트의 가망이라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노라고.
그러나 주인장에게 돌아온 것은 심한 욕설과 비방이었다. 그동안 아무런 문제 없이 버려왔던 쓰레기를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서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몇몇 노인들이 동네 사람들까지 선동하고 나선 것이다.
못 버리게 한다는 이유였다. 자신들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행정기관에서 종량제 봉투 사용을 하라고 내놓은 검은 비닐에 스티커를 붙이고 전단지를 손에 들려주었다. 카메라를 달았지만 적발되어 과태료가 나와도 체납으로 일관했다.
근본적인 대책이 없다 보니 민원이 생기면 청소과에서 후딱 치워준 것도 화근이었다. 주인은 불공정을 문제 삼았다. 자신은 종량제 봉투를 반드시 사용하고 음식물 수거도 별도로 규정대로 지키고 있는데 잘못된 행태를 보존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한 거였다.
주인은 쓰레기 수거장소를 변경해달고 요청하게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또 지역주민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주인장을 향한 비난이 더 늘어난 상황이었다. 지나가는 노인이 느닷없이 가게에다 대고 손가락질을 하며 심한 욕설까지 내뱉었다. 힘들게는 살았지만 험한 욕설까지 들으며 살지 않은 주인장은 충격이 너무 컸다. 불면증에 울렁증까지, 게다가 가게를 얻기 위해 받은 대출이자까지 쌓여만 갔다. 매출은 당연히 바닥이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민 끝에 경찰서에 고소장까지 접수한 상태였다.
물론 저쪽 상대의 이야기도 들어야 하겠지만 참 묘하게도 에누리 없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상황이 그려졌다. 자주 볼 수 있는 동네의 풍경이었다. 비단 이곳만의 문제겠는가, 도심지 어느 곳이든 발생하고 있지만 문제 삼지 않는 것, 그럼에도 누군가가 떠안고 가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물론 갈등은 일방적이지 않기에 상대도 분명히 속상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중간에서 서로의 간극을 좁혀 줄 동기가 없었고 중재에 나서는 이웃은 더더구나 없다. 오히려 편을 나눠 공격을 일삼는 상처투성이의 시간만이 있었겠지. 이미 행정기관에서 할 수 있는 것들, 주민을 찾아가서 원칙을 이야기하고 계도를 하고 서로를 이해하도록 매개체 역할은 했다. 최선이라고는 못하지만 가지고 있는 카드는 모두 제시한 셈이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일들은 오롯이 갈등 당사자들이 풀어야 할 것들인데 이 또한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서너 차례 눈물을 쏟아내던 주인장은 후반부로 갈수록 투사의 모습으로 변했다. 전문가로서 자신의 재능을 떨치며 젊은 시절을 보냈고, 한때 척박하다는 서울에서도 자신 명의의 가게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다 사업실패로 이곳까지 왔지만 남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얻어먹고 살지는 않았다고. 그래서 이제는 더 잃을 게 없으니 싸워보겠노라고. 사회 질서를 지키지도 않으면서 수시로 인격모독을 일삼는, 그리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이웃을 상대로 법의 준엄한 판단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어 ‘참으시면 안 될까요?’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 말속에는 내가 관할하는 동네니 시끄럽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아주 이기적인 생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첫 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이 점을 명심해라.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처럼 유리한 위치에 놓여있지 않다는 걸.”
그녀는 지난 일 년 동안 수없이 생각해 왔을 것이다. 싸우자고 했다가도 참으려고 했다가도,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을 뒤집었다 접었다 했을 고민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되었다.
대화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메뉴가 눈에 띄었다. 여름으로 달리는 계절이었다. ‘서리태 콩국수’가 눈에 띄었다. 유심히 쳐다보니 주인장이 자신이 직접 콩을 갈아 만든다고 한다.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맛집이 분명하다. 어차피 점심시간에 근처 식당을 이용하는 편이니 시간 될 때 자주 들러주고 널리 알려주는 게 확실한 도움은 아닐까?
이쪽은 이렇게 상황을 들었으니 이제 저쪽 상대도 만나봐야 한다. 밉든 곱든 우리 주민이다. 분명히 그쪽도 사정은 있을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서로가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업번창을 기원하며 민원의 시작 지점인 쓰레기 금지 안내 푯말을 뒤로하고 사무실로 향했다. 녹음이 짙어진 칠월의 공기가 몸살 앓듯 묵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