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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문답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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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기정 May 06. 2024

[산문집] 시기에 맞는-


밤길을 걷는다. 일부러 인적이 드물고 건물이 오래된 음산한 길을 고른다. 어둠은 무섭지 않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내면의 무너짐이니까. 밤길을 걷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으니까. 한 차례 식은 여름밤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진다. 누추한 차림으로 목적지 없는 발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는 게 느껴진다. 또 다른 나다. 내가 가진 의지가 꺼져갈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녀석. 비관적이고 우울하며 부정적인 이야기만 해대는 고장 난 인형, 정신병자.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나를 똑똑히 바라보며 말한다.


“다시 무너질 생각은 없어.”


“너를 무너트릴 생각은 없어.”


“그럼?”


“멈추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왜지?”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해.”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결과물을 원해.”


”멈추지 않으면 잃는 게 더 많을 거야. “


”멈추지 않는다면 무엇을 잃지? “


”인간성, 사랑, 끝내 모든 감정까지. “


”그것들을 버리고 성공을 가지겠어. “


”..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야. 나이에 맞게 움직여.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란 말이야. “


녀석의 말을 끝으로 나는 다시 뒤돌았다. 대답하기 싫었다. 대답할 가치가 없었으니까.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건데, 그러니 지금도 쉴 틈 없이 달려 나가고 있는 건데 주변을 둘러보라니, 나이에 맞게 행동하라니. 미친 소리가 따로 없-


-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뒤돌아 떠난 너는 얼마 가지 않아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차에 치여 죽었다. 그러게,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라고 했잖아. 나이에 맞게 움직이라고. 병신 같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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