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 영상은 내 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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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던 시기였다.
아무 계획도 없이 지내던 어느 날, 집 바로 옆에 있던 편의점에 도시락을 사러 들렀다. 전자레인지에 도시락을 데우고 있었을 때, 여자 사장님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처음 보는 손님인데, 여기 뒤에 아파트 이사 왔어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사장님은 내 눈빛이 반짝거린다고, 대화도 재미있게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침 야간 근무자가 필요하다며 나에게 일을 제안했고, 나는 편의점 위치가 상업지역보다는 주거지역 가운데 있어서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2017년 6월부터 편의점 B 근무가 시작됐다. 다시 계산대 앞에 섰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익숙한 듯 보였으나 모든 게 새로웠다. 달라진 건 하나, 나는 ‘야간 근무자’였다는 사실이었다.
편의점 B는 늘 조용한 시간에, 한 번씩 커다란 사건들이 터지는 공간이었다. 손님 대부분이 늦은 퇴근길의 직장인, 학원 마친 학생, 그리고 술에 취한 사람들이었다.
그중 하나, 잊을 수 없는 ‘99년생’ 남자 손님. 그 질긴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 것 같다.
그 사건의 시작은 신분증을 요구한 그날부터였다.
누가 봐도 미성년자 같은 그는 술에 취해 있었지만, 대화는 가능했다. 정중하게 웃으며 신분증을 요청했다. 그러자 돌아온 건 외모에 대한 욕설이었다.
“아씨, 야 너 여자 맞아? 남자 아냐?”
그렇게 시작된 말은 외모, 말투, 옷차림까지 모욕했고, 욕설은 점점 격해졌다. 초점 없는 눈빛은 신변의 위협으로 다가왔고, 나는 더 이상 감당이 되지 않아 긴급 벨을 눌러 파출소를 호출했다. 하지만 그는 도망갔다.
그 뒤로도 두 차례 이상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도망가는 바람에 잡지도 못했다. 경찰관들은 귀찮다는 듯 “순찰 강화하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느 날 아침, 교대 근무 중 그가 다시 나타났고 교대자에게는 친근하게 인사하며 당당하게 신분증을 내밀었다.
“담배 줘.”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고 있는데, 교대 근무자가 계산을 끝마쳤고 그는 당당하게 나갔다. 근무자에게 “저 사람 나이가 몇 살인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묻는 동안, 그는 방금 전 계산하고 나간 술 취한 아저씨 손님과 밖에서 몸싸움을 벌였다. 나는 다시 파출소에 신고했고, 둘 다 경찰차를 타고 떠났다.
그날, 나는 일이 끝나고 치과 가는 길에 편의점을 관리하던 남자 점장님과 통화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점장님은 교대자에게 연락처를 받아 통화했고, “다시는 안 그런다고 약속받았으니 이제 안심해도 된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는 또 술에 취해 매장에 들어왔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체가 내 쪽으로 기울어져 금방이라도 한 대 때릴 기세였다는 것이다. 나는 긴급벨을 눌렀고,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말로 붙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번엔 경찰이 그를 체포했다.
다음 날, 그의 아버지가 찾아와 “죄송합니다”라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남동생들이 겹쳐 보였던 탓일까. 나는 마음이 약해져 사과를 받아주었고, “다시는 출입 안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며칠 뒤, 그는 다시 왔다. 통유리창 너머로 빤히 나를 보며 씩 웃고 갔다. 또 어떤 날은 친구를 시켜 담배를 대신 사 오게 하고, 자기는 밖에서 나를 응시했다. 소름 돋는 시선은 점점 더 공포로 변했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뭔데 저러는 걸까? 신분증 요구한 게 그렇게 잘못된 걸까?
결정적인 날이었다. 그는 약속을 어기고 술에 취해 비틀비틀 카운터로 다가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신고하기 전에 나가세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살기가 가득한 말투로 욕설을 쏟아냈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때, 통유리창 너머 상황을 지켜보던 파란 패딩을 입은 남성 손님이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아니었으면, 나는 그날 뉴스에 나오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손님은 벌벌 떨고 있는 나를 대신해 경찰에게 상황을 설명해 줬고,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라며 계속 위로해 줬다.
하지만 그는 “너 이년 남자친구야? 뭔데 끼어들어? 씨발새끼야.”라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경찰관에게 끌려나갔다.
곧바로 연락받은 그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도대체 왜 그러냐”며 소리를 지르자, 그는 “저년이 먼저 시작했다”, “왜 나를 무시하고 왜 저렇게 쳐다보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어느 순간 해가 떴고, 상황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웃기게도 나는 그 상황을 겪고도, 교대자가 올 때까지 근무를 해야 했다.
보호받지 못했고, 잠깐 동안 쉬지도 못했다. 손님들 응대하며 상품 계산을 하고, 머릿속에서는 새벽에 일어난 일들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고소장을 제출하기 위해 이면지에 전후 사정을 쓰고 있었다.
퇴근 직전, 그의 아버지가 또다시 찾아와 자식을 대신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고, “한 번만 더 선처해 달라”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이제는 더는 못 참겠습니다”라고 하자, 바로 표정이 변했다. “마음대로 해!”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한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근무를 마치고 파출소에 가서 고소장을 제출했다.
며칠 후, 그는 다시 찾아왔다. 맨 정신, 정중한 태도.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받은 정신적 피해는 영원히 남아 있을 테니까. 그는 수긍하듯 나갔다.
그 뒤, 동료 언니가 카톡을 보내줬다. 점장님이 날 저격한 메시지를 프로필에 해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줬다.
그의 아버지:
“아르바이트생이 선처를 안 해주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점장님:
“현금으로 몇십만 원 주고 합의하세요. 돈 주면 해결돼요.”
알고 보니, 점장도 그의 편이었다.
그날 같이 일하던 언니와 욕이란 욕은 다 퍼부으며 울었다. 아르바이트생을 보호해야 할 점장이, 오히려 뒷거래를 종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조건 네 편이야” 하던 사장님은 사건이 커지면서, 설날이랑 겹치자 스트레스를 이유로 폭발했다.
“왜 고소까지 했어? 동네 장사에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그리고 네가 뭔데 손님 출입을 막아?”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중요 자료였던 CCTV 영상은 고장 난 마우스 때문에 제출하지 못했다. 근무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우스가 고장 난 걸 알고 꾸준히 교체 요청을 했지만, 이 사달이 날 때까지 교체되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PC에 관심이 있었더라면, 아니 바로 앞에 있던 PC방 손님 중 아무나 붙잡아 부탁했더라면 진작에 해결됐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현장에서 바로 확인이 되고, 순찰 강화나 다른 조치가 조금 더 빨리 취해지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이 사건이 모두 마무리된 뒤에야 들었다.
다행히, 그날 파란 패딩의 남성 손님이 음성 녹음을 해줬고, 그 덕분에 모욕죄는 성립됐다.
그 후로도 끝이 아니었다. 그는 여자친구와 함께 찾아왔고, 여자친구는 이유 없이 나에게 화를 냈다.
처음엔 사과를 하고 나갔지만, 곧 다시 들어와 말했다.
“야, 그만 좀 해라. 죽기 싫으면.”
그 남자의 표정은 사람 한 명 죽인다고 해서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경고 같았다.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던 평창동계올림픽 시기, 그 손님의 나이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그리고 나는 1993년생, 25살이었다.
이 뒤에도 나는 편의점을 그만두지 못했다. 그때 그만둔다는 건 두 가지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니까.
첫 번째는 잘못한 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겁을 먹고 도망가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게 그런 것이라면 나는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기로 남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고집이었다.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은 알바였는데, 그런 사람들로부터 도망가고 싶지 않아서 남았다는 게 참 바보 같으면서도, 조금은 멋있었다.
편의점 B 근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