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 너머에 있던 일들
새 편의점 오픈을 준비하던 사장님은 몇 가지 조건을 내걸며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고민이 많아졌다.
그 당시의 나는 편의점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이제는 새로운 일을 해보자’고 스스로 다독였지만, 막상 그만두려 하면 도무지 다른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편의점 일이 전부였고, 가진 것도 없었다. 월세를 내고, 치과 치료 때문에 받은 대출을 갚으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한다는 게 막막했다.
결국 여러 번의 고민 끝에 답을 내렸다. 사장님을 따라가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2019년, 전주의 또 다른 동네에 있는 편의점 C에서 일하게 됐다. 낮에는 골목이 멀게만 느껴졌고, 밤에는 정적이 짙게 깔렸지만 하루의 풍경은 늘 비슷했다.
그중 가장 익숙한 모습은 위층에 살던 건물주 어르신이 손자와 함께 가게에 내려오는 장면이었다. 유치원에 다니던 그 아이는 밝고 활기찬 남자아이였다. 카운터 안으로 들어와 이것저것 물어보며 한참을 놀다가 가곤 했다. 건물주 할아버지도 늘 친절했다. 들어올 때마다 “여사장님은 또 어디 가고 너만 있냐”며 웃으셨고, “그냥 네가 인수해서 사장해라”라는 농담도 자주 하셨다.
편의점에 어느 정도 적응했을 때 여사장님이 처음으로 회식 이야기를 꺼냈다. 몇 년 동안 일했지만 회식은 처음이었다. 오전 근무를 맡았던 언니와 사장님, 나. 셋이서 함께 고기와 술을 먹었다. 먹는 내내 편의점 운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사장님은 재정 상황이 나아지면 월급도 인상해 주겠다고 했다. 그 분위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하지만 회식이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오전 언니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언니는 이혼 후 생계를 위해 편의점 일을 시작했고, 집이 좁아 짐 대부분을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전 남편의 폭력과 접근금지 명령 때문에 늘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어느 날은 전 남편이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무섭다고 말했다. 그날부터 언니는 매장 뒤편 창문을 통해 원룸 주차장으로 출퇴근했고, 가끔은 남자친구가 데리러 오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창고에 있던 언니의 짐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모두 사라졌을 때, 언니는 금고에 넣어둔 돈도 함께 사라졌다. 언니 하고는 “미안해”라는 짧은 카톡이 마지막 인사였다. 편의점은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사장님은 결국 고소하지 않았다. 근로계약서도 없고, 최저시급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경찰이나 노동청을 끌어들이는 건 사장님 입장에서도 손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어서인지 사장님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나는 금고에서 사라진 돈보다, 언니가 지금까지 일하면서 받지 못한 주휴수당과 추가 근무,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계산해 보았다. 비교해 보면 언니가 훔쳐간 액수는 오히려 적다고 생각했다.
그 일을 겪고 나니, 같이 근무하던 언니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런 사장님 밑에서 짧게는 1년, 길게는 몇 년을 버텨 온 것이다. 단단한 성격으로 의지가 되던 언니, 치아 교정으로 고생하던 언니, 오랜 연인과 결혼한 언니까지. 현재는 모두 연락이 끊겼지만, 그 시절 언니들이 있어 즐거웠다.
그 시절 편의점에는 젊은 손님들도 많았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소동이 생기곤 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나보다 훨씬 어린 남자 손님이었다. 술에 취해 지인들과 함께 들어와서 지인들이 먼저 계산하고 나가고 그는 혼자 남아 내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편의점 밖으로 나가 “여기 레즈비언이 일하고 있습니다! 내 고백 안 받아주는 이유가 그거예요!”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몇 분간 그렇게 소리를 지르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당황스럽고 창피했다.
그러나 곧 그의 행동은 성인답지 못한 방식의 고백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화가 나기보다는 어이가 없었고, 동시에 그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 건물주 할아버지와 위층 주민이자 단골손님들이 괜찮냐며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그 한마디가 참 고마웠다.
며칠이 지나자, 다시 예상치 못한 순간이 찾아왔고 그렇게 평온하지 않은 편의점 C에서의 마지막이 다가왔다. 꺼내지 못했던 말을 내뱉었고, 그 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그 순간은 나의 선택을, 내 삶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