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로 해명해야 했던 시절
나는 어릴 때부터 외모로 놀림을 많이 받았다. 못생겼다는 말은 일상처럼 들었고, 연예인이랑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비교당하기도 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외모에 대한 놀림과 따돌림은 끊이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성인’이라는 자각에 들떠 있었다. 어른이 되었으니 이제 나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변화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내 스타일을 찾아 이뻐 보이고 싶었다. 가발을 쓰기도 했고, 힐을 신기도 했고, 또래처럼 긴 머리에 메이크업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짧은 머리가 나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이게 내가 찾던 내 모습이야.” 그렇게 짧은 머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외모는 여전히 논쟁거리였다. 일터에서는 학생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고, 성별을 묻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오해와 간섭은 말다툼으로 번지기도 했고, 경찰서에 신고하는 일도 생겼다. 지칠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비슷했다.
“여자는 여자다워야지.” “좀 예쁘게 하고 다녀.” “그러니까 좋은 남자 못 만나는 거야.” “그런 일에 휘말리는 건 네 겉모습 때문이야.” “멀쩡하게 생겼는데 왜 그러고 사냐.” “결혼은 해야지.” “정상적으로 살아야지.”
그 시기부터 꾸밈은 즐거움이 아니라 생존의 도구가 되었다. 긴 머리는 나를 지키는 벽이었고,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한 보호막이었다.
그런 방어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결국 한계가 찾아왔다.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닿는 감각이 점점 더 괴로워졌고, 피부에는 발진이 올라왔다. 병원에서는 스트레스성 피부염이라 진단했다. 20대의 나는 현대인의 고질병을 많이 갖고 있었고, 한두 번은 과로로 쓰러진 적도 있다.
안식처였던 봉사활동 모임에는 내가 좋아하던 분이 있었다. 그분은 내게 말했다. “짧은 머리 잘 어울린다. 예쁘다.” 짧은 머리를 하고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그 한마디는 나를 무너뜨리지 않고 지탱해 주는 말이 되었고, 사회적인 시선에서 완전한 나로 돌아왔을 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첫 번째 변화는 꾸밀수록 누군가의 평가 대상이 되었고, 그 감정은 늘 결핍처럼 따라붙었다.
두 번째 변화는 하고 싶어서 했던 짧은 레터링 하나가 오랜 시간 계산대 앞에 서면서 의미가 변해갔던 일이다.
편의점에서 근무할 당시, 어느 날 아주머니 손님이 계산을 마치고 나를 유심히 보더니 내 팔을 확 잡았다. “아니, 여자여? 남자여?” 손으로 내 팔을 훑으며 “하얀 걸 보니까 여자네.”라고 말했다. 나는 분명하게 말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CCTV도 있고, 신고할까요?” 아주머니는 사과 대신 같은 여자끼리 팔 한번 만져봤다고 유난이네 내가 너만 한 자식이 있어 당당하게 말하고 나갔다. 남은 것은 수치심과 팔목에 선명한 멍이었다.
그날 이후, 내 하얀 팔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던 핏줄을 가리고 싶었다. 왜소한 내 몸이 덜 보이도록, 더 강해 보이도록.
타투가 늘어날수록, 일터와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들도 많아졌다. “몸이 도화지야?” “부모님이 주신 몸을 소중히 해야지.”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나의 선택에 무관심하거나 무덤덤했다. 엄마는 딱히 관심이 없었고, 아빠는 “멋있게 잘했네. 네 몸인데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고 했다. 그 말은 나를 지지해 주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 뒤로 양쪽 팔에 타투는 점점 많아졌다. 단순히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를 방어하고 지키기 위해서였다. 사회가 정한 정상성, 성별의 이미지, 외모 기준이 나를 누를수록, 타투는 나의 언어가 되었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살아주지 않으니, 내 몸은 내가 지키겠다는 선언이었다.
세 번째 변화는 치아교정이었다. 조금이라도 평범해지고 싶었다. 얼굴을 전부 뜯어고칠 돈과 여유는 없었지만, 교정만큼은 내가 무리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교정 이벤트를 보고 치과를 방문했다. 처음 찾은 치과에서는 “굳이 교정까지는 필요 없다”라고 했지만, 이후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조차 없었다. 급하게 다른 치과를 찾았고, 그곳에서 교정보다는 치료가 시급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치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교정을 시작하게 되었고, 교정기를 끼면서 식사를 잘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살이 많이 빠졌다.
내가 선택한 세 가지 변화는 그저 나를 위한 것이었지만,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평가되고 소비되는 먹잇감이 되었다.
“남자야? 여자야?”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고, “레즈비언이에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트랜스젠더예요?" 실제로 오해하신 여성분들 중에는 전화번호를 주거나 고백을 해오신 분들도 있었다. 솔직히 그때는 심장이 많이 뛰었다.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우신 분들이 고백을 해오니까 '내가 그 정도인가?' 싶기도 했고, 자존감과 자존심이 단번에 올라갔다. 물론 나는 남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그런 고백은 사막 같던 내 20대 시절에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나에게 고백해 온 남성분들은 거의 대부분 술에 취해서 용기를 내는 경우였고, 나는 그게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나도 또래처럼 연애는 하고 싶었지만, 나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술기운을 빌려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그게 한두 잔이 아니라,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는 점이다. 그런 일이 계속되다 보니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고, 나중에는 욕이 나올 만큼 불쾌했다.
그것뿐만 아니다. 어떤 날은 손님을 상대로 고소장을 작성한 적도 있고,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오는 날도 있었다.
절정이었던 시기에는 위로처럼 웹툰 하나가 나에게 닿았다. ‘오라존미’라는 웹툰이다. 나는 그 웹툰을 통해 잊고 있던 나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는 말이 되냐고 하겠지만, 때론 그 말도 안 되는 것에서 사람이 위로받고 나아가게 된다. 이날의 나는 좋아하는 나를 다시 찾아가 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내가 일했던 곳에서 동료들이 외모 때문에 종종 손님과 실랑이를 벌였다. 어떤 날은 경찰까지 오기도 했다. “왜 이렇게 다들 외모에 관심이 많아?” “우리만 이런 거야?” “자기 인생이나 잘 살지, 왜 남한테 이래라저래라야?” 그런 말들을 우리는 푸념처럼 나눴다. 그 말들이 곧 위로였다.
지금은 다르다. 짧은 머리, 타투, 꾸미지 않은 얼굴, 그리고 흔하지 않은 이름. 개명한 이름으로 나는 내가 되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말하지만, 나는 그냥 일터에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계산대 앞에는, 오늘도 다른 사람들이 서 있었다. 나처럼,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