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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진심인지 진상인지

편의점 B에서 마주한 위험한 얼굴들

by 지화


편의점 B는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이 더 많은 곳이었다. 하루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별의별 상상이 떠오르는 편의점이었다. 잠들기 전에는 편의점이 폭발하는 상상부터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상상까지, 온갖 장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만큼 마음이 무너졌던 시간들이었다.

매장은 늘 어수선했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답답했다. ‘이렇게만 정리하면 일하는 우리도 편하고, 손님들도 더 좋아할 텐데’ 하는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급여 같은 민감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하나둘씩 내가 일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발주를 수정하고, 진열을 손보고, 청소와 정리까지 맡았다.

애초에 이곳은 계약서조차 쓰지 않고 일을 시작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내가 조금씩 일을 떠안다 보니, 어느새 손님들과 직원들 사이에서 점장이라 불릴 만큼 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야간 근무자였지만 초과 근무가 더 많았다. 크고 작은 사건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도 아닌, 세 번 넘게 긴급벨을 누를 정도였다. 늘 오시는 파출소 경찰관 두 분이 있었는데, 한 분은 백발의 중년 남자였고, 다른 한 분은 젊은 경찰이었다. 어느 날, 백발 경찰관이 짜증이 잔뜩 묻은 표정으로 말했다.

“한숨 한 번 쉬고… 긴급 상황 아니면 누르지 마세요. 학생분, 지금 다쳤어요? 피나요? 긴급벨은 정말 위급한 상황에만 누르는 거예요. 사장님한테 설명 못 들으셨어요?”

그 말에 화가 나면서도,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괜히 눌렀다가 진짜 위급한 상황을 놓치면 어쩌나 싶었다. 동시에 ‘내가 피 흘리며 죽기 직전이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건가’ 싶어서, 서글프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턴 숨 넘어갈 때 누를게요. 다른 직원분들한테도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경찰관은 한숨을 쉬고는, 더 말하려던 걸 젊은 경찰이 제지하며 말했다.
“순찰 강화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떠났다.

지금은 긴급벨 매뉴얼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20대 후반이던 나에게 그 시스템은 쓸모는 없으면서도 아주 조금은 안심이 되는 장치였다. 오히려 계산대 옆 통유리 덕에 지나가는 사람이 들여다볼 수 있어서, 누가 들어와 도와줘서 뉴스에 나올 일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곳에는 정말 별의별 손님이 다 있었다.

어느 날은 건설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가 제품을 가지고 카운터로 왔는데,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내가 바코드를 찍고 있는데 갑자기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는 사람 죽여봤어? 난 사람 죽여봤어.”

얼굴을 쳐다보자, 웃고 있는 입과 달리 눈빛이 서늘하게 꽂혀왔다. 몸이 얼어붙었다. 진상 손님을 수없이 겪으며 생긴 ‘위험 감지 레이더’가 작동했다. 본능적으로, 이 사람은 진심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사람은 계속 말했다.
“사람도 죽여봤는데, 다들 너무 짜증 나게 해서 요즘 온몸이 근질근질해. 아가씨,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최대한 평온하게, 빠르게 계산하고 내보내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아 그래요? 누가 그렇게 사장님을 짜증 나게 한대요. 착한 사장님이 조금만 참으세요. ○○원입니다.”

그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말 한번 잘하네, 아가씨.”

그러곤 웃으며 매장을 나섰다. 그가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 죽여봤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손님은 의외로 종종 있었다. 술김에, 혹은 맨 정신으로도. 하지만 그중 진짜 공포를 느낀 건 이 사람이 유일했다.

또 다른 날은, 낮 시간에 젊은 커플이 매장에 들어왔다. 둘이 웃으며 물건을 고르다가, 순식간에 언성이 높아지더니 멱살잡이를 시작했다.

여성분이 소리쳤다.
“경찰 불러! 경찰!!”

나는 바로 신고했다. 남성분이 고함쳤다.
“영업방해하지 말고 나가서 이야기하자!”

그러자 여성분이 외쳤다.
“왜? 나 죽이게? 그래, 죽여봐! 끝까지 가보자!”

경찰이 올 때까지 둘은 소리를 질러댔다. 경찰이 도착해 내가 상황 설명을 하고 나서야 그분들은 진정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며칠 뒤 그 커플이 다시 매장을 찾았다.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웃으면서. 얼굴엔 멍이 가득했지만, 그날은 말도 곱게 하고 웃으며 계산을 마쳤다. 그렇게 나갔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좋아하는 얼굴로.

편의점 안엔 수많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엔 마주친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지우고 싶은 얼굴들이 제일 오래 남는다. 말투까지 선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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