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정수기 필터 교환을 위해 매니저님이 다녀가셨습니다. 벌써 3년째 뵙다 보니 이제 제법 친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비록 3개월에 한 번씩 만나지만 방문하시는 매니저님도 맞이하는 저도 조금씩 가까워지다가 오늘은 어제 보고 오늘 만난 듯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앵글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벽에 가고 싶은 대학을 적어서 붙여두었습니다. 목표를 높이 잡아야 따라잡든 그 언저리까지 가든 하지 않겠느냐며 야심 차게 붙여 둔 이름표는 2년이 다 되도록 건재하게 붙어있습니다. 벽, 리모컨, 냉장고, 현관문, 침대 위 천정, 화장실 할 것 없이 제 눈에 띄는 모든 물건, 모든 장소에 대학 로고를 붙여두었습니다. 하물며 정수기에도 붙여져 있습니다.
이름표를 붙이고 얼마 되지 않아 방문하셨던 매니저님은 앵글이와 같은 나이의 딸아이를 키우고 계십니다. 그래서일까요? 오실 때마다
"아직, 마음이 그대로래요?"
라고 묻습니다. 앵글이가 목표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정진하고 있는지 묻는 질문이라는 것쯤은 알고도 남습니다. 같은 학교에 딸아이를 서로 보내고 있다 보니 시험 일정도 당연히 같습니다. 중간고사가 월요일에 끝나고 오답 확인과 사인이 마쳐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더 궁금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번 중간고사에 원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정시를 준비해야겠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아~ 우리 애랑 같은 말을 하네요. 우리 애도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았는데 성적이 안 나온 것 같더라고요. 많이 속상해해요."
"그렇죠. 아이들이 당사자니까 엄마보다 더 마음이 힘들겠죠."
"그런가요? 저는 잔소리를 했는데... 시험 망쳤다고 짜증 내면서 공부는 안 하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한 소리 했죠. 어머니는 야단치지 않으셨나 봐요?"
"이미 나온 결과를 두고 야단친들 뭣하겠어요. 속상해도 본인들이 더 속상하겠죠." "늘 느끼는 건데... 어머니는 말씀하시는 게 다른 분들하고 좀 다르신 것 같아요."
"제가 그런가요?"
"네~ 저는 오늘 아침에도 아이랑 한바탕 하고 학교에 보냈거든요."
"왜요?"
"아침에 깨우기가 너무 힘들어서요. 벌써 지각을 세 번이나 했다니까요?"
"저는 원래 안 깨워요. 지각도, 결석도 제 스스로 감당할 제 몫이고 제 인생이죠."
"우와... 저도 그렇게 키울걸 그랬어요. 아침에 아이 깨우려면 전쟁이에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안 깨워줬어요. 하루 늦잠 자고 지각하거나 결석하게 되면 본인이 정신 차리고 깨어서 학교에 갈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이 성격도 있겠지만 그래서인지 엄마가 안 깨울 것을 알고 알람을 여러 개 맞춰두고 자더라고요."
"그런 뱃보가 제게도 있었어야 되는데 저는 제가 조바심이 나서 깨우고, 또 깨우고, 그래도 안 일어나면 버럭 화를 내게 되더라고요. 오늘도 아침에 다섯 번쯤은 깨운 것 같아요. 아침마다 전쟁이죠. 그러다가 너무 화가 나서 '학교 가지 마!'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죠. 돌아서면 후회할 걸 왜 그랬나 모르겠어요."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건 다 똑같죠. 사춘기에 나오는 성장호르몬이 잠자는 호르몬이라고 하더라고요. ㅎㅎ"
"그런데도 안 깨우세요?"
"한 번 깨워주기 시작하면 계속 깨워야 하잖아요. 원래 안 깨워주니까 아이들이 둘 다 알아서 일어나더라고요. 10살 동글이도 혼자 일어나요."
"아~ 되게 신기하네요. 아이들이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
아이들 스스로 아침에 일어나 학교 갈 준비하는 이야기만으로도 수다가 한가득입니다. 별 내용이 아닌데도 엄마들이 만나면 아이들 이야기 만으로도 하루가 부족하죠.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는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30분이 채 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많은 듯한데 손은 바삐 움직이고 정수기 소독을 하면서 등진 채 계속 말을 이어가십니다.
"요즘에 사춘기가 왔는지 말수도 적어지고, 자꾸 짜증 내고해서 많이 부딪쳐요. 안 그랬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외동이를 키우셔서 더 그렇게 느끼시는 것 같아요. 비교 대상이 없으니까요. 제가 둘째를 키워보니까 첫째가 미숙한 듯 보였어도 사실 둘째에 비하면 잘했던 것이 더 많더라고요."
"그래요? 적어도 둘은 낳았어야 될걸 그랬나요? ㅎㅎㅎ"
"한 명만 키울 때는 계속 엄마가 곁에서 챙겨줘야잖아요. 둘째가 15개월쯤 되니 같이 놀아주면서 엄마와 조금씩 거리두기가 되더라고요. 이래서 어른들이 여럿을 낳으라고 하는구나 싶었어요."
"우리 애도 크면서 많이 외로워했어요. 그런데 물어보면 동생은 싫다고 하고, 우리 사는 것도 바쁘고 해서 하나만 낳았죠. 요즘 자주 아이랑 부딪치고 싸우게 돼서 오늘도 거친 말을 좀 했거든요. 어머니랑 이야기 나누다 보니 좀 미안하고 후회가 되네요."
"그럼, 오늘 퇴근하고 집에 가시면 딸아이와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고2라서 스트레스가 많을 거예요. 더군다나 금번 중간고사가 좀 많이 어려웠던 것 같더라고요."
"마주 앉아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을 텐데...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사과 먼저 해 보세요. '미안하다'라고 사과 먼저 하시면서 말을 건네시면 조금 더 수월하게 대화하실 수 있을 거예요."
"사과요?"
"마음이 상했을 때는 한 시라도 빠르게 사과하는 것이 좋죠. 그냥 좋아하는 음식 만들어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치면 쌓여있는 상처는 사라지지 않아요.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건네주시면 상처가 치유되죠. 마음의 상처는 사과받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더라고요."
"아... 그렇군요. 그럼 오늘은 사과를 먼저 해야겠어요. 사실, 아이한테 미안하다고 이야기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매니저님만 그러신 게 아니고, 보통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사과하지 않죠. 그런데 제 생각에는 어른이고 아이고 상관없이 잘못한 사람이 먼저 사과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한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마음을 풀어주는 일을 해요."
"어머니랑 이야기 나누니까 뭔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에요. 조금 더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다음 집에 갈 시간이 다돼서 아쉬워요... 요즘 너무 바쁘거든요."
"언제든, 쉬는 날 연락 주시고 오세요. 제가 커피 한 잔 함께 나눠 드릴게요."
"정말요? 아유~ 감사해요. 진짜 연락드리고 한 번 놀러 올게요."
매니저님은 아쉬운 걸음으로 몇 번을 뒤돌아보며 가셨습니다.
살다 보면 상처가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 일들 가운데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가족 간의 상처인 것 같습니다. 가족이 주는 상처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덮이고, 덮이고, 또 덮이며 세월이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부모라는 위치를 상위에 두고 자녀를 하위에서 지휘하는 것은 좋은 관계가 아닙니다. '권위'라는 것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세워줘야' 비로소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권위적인' 부모일까요? 아니면 '권위 있는' 부모일까요?
긍정적 의미의 권위란,
부모는 아이가 수행 가능한 과제를 요구하고, 이에 적절한 지원과 격려를 해 주어야 합니다.수용적이고 애정 표현에 인색하지 않으며 언제나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되 지나치지 않아야 합니다. 아이에게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책임을 지닌 선택권을 주고, 존엄성을 가진 한 인간으로 대우하며,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대화하고 아이의 선택에 대해 긍정적인 지지를 해 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일탈 행동을 한다거나, 규칙을 어겼을 때, 몇 번의 적절한 경고를 하고 그것이 부모의 권위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면 아이가 감당할 만한 훈육을 해야 합니다.
건강한 권위를 가진 부모는 항상 일관된 메시지, 부모가 합의된 메시지를 아이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하나의 상황에 대해 엄마와 아빠가 각자 다른 지시 사항을 내린다면, 아이는 엄청난 혼돈에 빠질 수 있습니다.
권위적인 양육환경은,
일방적인 지시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환경을 말합니다. 아이에게 자주 소리 지르고, 비난하고, 비꼬고, 비교하는 양육방법을 선택합니다. 부모가 일방적으로 정한 규칙에 관하여 아이의 합의를 강요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규칙을 아이가 지키도록 요구합니다. 부모의 기분에 따라 종종 같은 상황에 대해 다른 원칙을 적용하기도 하고, 훈육을 하는 것에도 일관성이 없습니다.
오직 권위적으로만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부모는 자신의 불안을 투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차별하고, 선택적 강요를 하거나, 첫째와 둘째에 대하여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마음이 더 가는 자녀가 특혜를 누리거나 무조건적 양보를 요구당하고, 다른 자녀에게는 엄격한 규칙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우리 아이는 잘 클 것이다'라는 믿음은 부모의 불안을 다스리는 강한 힘이 됩니다. 불안한 부모에게서 권위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마음을 먼저 다스리고 아이의 마음과 행동에 관하여 교육하는 것이 긍정적이고 권위 있는 부모가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