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의 하루도 고달프다
고2가 된 딸아이는 엉덩이 싸움 중이다.
"매일 10시간 앉아있기"
아이는 목표를 세우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드물다. 아니, 사실상 거의 없다. 그저 냉장고 가득 아이가 좋아하는 먹거리를 채워 놓고 잔소리를 줄이는 정도가 최선이다.
며칠 전 딸아이가 냉장고와 간식 고를 열더니
"엄마~ 이거 다 나 먹으라고 채워 넣었어? 나 다이어트하는데...?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 혹시 노력하는 거야?"
"눈치챘어? 대신 공부해서 머릿속에 넣어줄 수도 없고 지켜봐 주는 것 밖에 해 줄 게 없어서 마음에 위안이라도 되라고 채워 넣었지."
"내 다이어트 최대의 적은 엄마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 신이 났다. 뒤적뒤적 먹거리를 고르며 흥얼거린다. 쵸코과자와 귤을 박스 채 들고서 식탁에 앉는다.
"다이어트한다며?"
"그러니까 조금밖에 안 꺼냈잖아."
"귤은 박스째 꺼냈는데?"
"흐흐... 귤은 맛있으니까 살 안 쪄!"
하하하... 으이그... 딸내미야... 과일도 엄청 살이 찐단다...
"엄마, 근데 나 공부하는 인스타 시작했어. 일주일밖에 안됐는데 팔로워가 300명이 넘었어."
"진짜? 그거 팔로워 숫자를 어떻게 늘리는 거야? 엄마는 10년째 하고 있는데도 팔로워가 그대론데..."
"말로 하기는 힘들고, 그냥 늘어났어!"
"뭘 올리는 건데?"
"그날그날 내가 공부했던 거 찍어서 올렸어."
"아무 말도 안 쓰고?"
"응, 아무 말도 안 쓰고 그냥 사진만 올려."
"근데도 팔로워가 늘어난다고? 진짜 신기하네?"
"보여줄까?"
"응"
"글씨가 엄청 이쁘네. 글씨를 잘 써서 팔로워가 늘어났나?"
"글쎄... 그럴지도... ^^"
딸아이는 긴장감이 있어야 공부 의욕이 생긴다며 집안 곳곳에 가고 싶은 대학 로고를 써서 곳곳에 붙여 놓았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린다며 새벽 5시부터 알람을 10분 간격으로 맞춰두고 일어나 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면서도 이쁜 것이 자기 삶의 1순위라며 가꾸는데 힘을 쓴다. 엄마 눈으로 봐도 어디 하나 소홀한 법이 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딸아이라 바라만 봐도 숨이 차다. 그렇다고 '조금 쉬어가도 괜찮다'는 말을 해주기가 미안하다. 그렇게 이야기해 주기에 고딩의 삶은 너무나 빡빡하다. 엄마가 애써 그렇게 살라고 하면 잔소리가 되겠지만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너무 열심히 살아가니 그 또한 보기 짠하다. 마치 아기를 키울 때 잠잘 때가 제일 예쁘지만 깨우고 싶고, 잘 놀고 있으면 어서 잤으면 하는 마음처럼 말이다.
2020년 7월 18일 오후 12시.
몇 달 만에 딸아이와 함께 데이트를 나섰다. 최근 들어 낮의 하늘은 너무나 청명하다. 티 없이 깨끗하고 푸른 하늘에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구름이 둥둥 떠다닌다.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예뻐 보이는 것들이 다른 것 같다. 어느 해에는 푸른 바다가, 어느 해는 핑크빛 벚꽃이, 올봄에는 구석구석 피어있는 잡초 속에 드문드문 언 땅을 뚫고 나온 들풀에 깃든 꽃들이 예뻐 보였다. 오늘은 맑고 먼지 한 점 없는 하늘이 딸아이와 맞잡은 손의 설렘 같다.
차 안에서 딸아이의 수다 삼매경이 시작됐다. 얼마 전 사귀기 시작한 남자 친구 이야기부터 다이어트까지... 딸아이의 생활 반경 안에 든 모든 것들이 이야기 소재가 되었다. 아직 사람과 사람 간에 오가는 사랑에 대해 미숙할 나이라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눈치코치 없는 이제 갓 한 달쯤 된 남자 친구 이야기가 거반이었다.
딸아이와 이야기할 때에는 되도록 많이 들어준다. 들어주기만 해도 한참 이야기하다가 스스로 답을 찾기도 하고 때로는
"엄마, 내 얘기 좀 들어봐.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지 내 나이라고 생각하고 얘기해 줘야 해!"
라며 중대발표라도 하듯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어제는 눈치코치 없는 남자 친구의 애칭 때문에 애들 말로 "빡친" 딸아이의 분노에 찬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아이가 쏟아 낼 만큼 풀어내도록 추임새만 넣으며 들어주었다. 밥을 먹을 때도 쇼핑을 할 때도 차 안에서도 두세 시간 원 없이 이야기하더니 이젠 됐단다... 후후...
아이의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들어주고는 엄마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다.
"남자 친구가 아직 사람 사귀는 것에 미숙해서 마음을 표현하는 게 서툴러서 그래. 그래도 애써 별명을 만들어서 부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던 것 같아. 애칭과 별명은 다르니까... 그리고 네가 싫다는 의사표현을 했는데도 계속하는 것은 너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었다는 생각이 드네? 엄마는 연인 관계로 만난 인연인 사람들은 서로를 더 아끼고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귀하게 대해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는 거거든. 살아보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내가 제일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더 함부로 하게 되더라. 내 거라고 생각하면 느슨해지고, 내 거니까 막 대해도 되는 것처럼 굴 때가 있지. 그런데 사람한테는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아. 그래서 엄마는 내 가족과 친구들을 고객이라고 생각하며 살려고 노력해. 고객 중에는 진상 고객도 있지만 함부로 말하거나 싸우지 않잖니? 가족이나 연인은 어쩌면 평생을 나와 함께 살아갈 사람이잖아. 그래서 흠집이 나고 상처되지 않도록 더 예의를 지키고 아껴줘야 한단다. 살다 보면 많은 인연들이 있잖아. 스치고 지나갈 사람들,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반갑게 인사하고 예의를 지키면서 나와 평생을 함께 걸어갈 사람들에게 내 거라고 생각해서 함부로 하면 안 되지. 엄마는 네가 그렇게 살아갔으면 좋겠어. 귀하게 대접받고, 귀하게 사랑도 나누면서... 남자 친구에게도 잔소리처럼 말고 조금씩 네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다가가 보렴."
다행히 고2는 이런 대화가 가능한 나이이다. 우리의 5시간 데이트는 오랜만에 함께 나간 거라서 아이가 먹고 싶은 것, 필요한 것도 사주고 여유롭게 차도 마시며, 서로의 생각을 묻고 답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너무나 맑은 낮의 하늘이 무색하게 해가 지자 갑자기 하늘에서 번쩍번쩍 섬광이 비쳤다. 번쩍 하며 지그재그 선처럼 비치는 번개랑 다르게 불길이 오르는 듯한 섬광이 신기해서 영상을 찍었다.
오늘은 초3 아들의 천문대 수업이 있는 저녁이다. 섬광이 비칠 시간에 아이는 천문대에서 망원경으로 저 장면을 볼 수 있었겠구나 싶어 내심 기대가 됐었다. 28층이라 하늘에 맞닿은 듯한 거실 창에서는 건물에 가려질 영향 없이 하늘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참 좋다. 몇 번은 그냥 지나치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 올 아이와 얘깃거리를 만들고 싶어서 영상을 찍었다. 요즘 하늘은 내게 살면서 관심 없이 지나쳤던 것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도록 만들어준다. 이전에도 붉은 섬광이 하늘을 물들였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어제의 섬광은 내 평생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굵고 묵직한 소리를 내는 천둥과 함께 번쩍 섬광이 20초 간격으로 거듭되어 찍으면서 신기하기도 아름답기도 했다. 얼마 후면 강한 빗줄기가 내릴 것이다. 아들이 돌아온 뒤에 비가 내리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10시 반이 되어서 아들아이가 신나게 들어왔다.
"엄마... 하늘이 주황색이었는데 그거 알아?"
"알지. 그래서 엄마도 영상으로 찍어놨어."
"그래? 난 세 번이나 봤는데 바로 머리 위에서 번쩍이는 거야. 친구들이랑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질까 봐 엄청 무서웠다니깐?"
"그랬구나... 망원경으로 보니까 더 잘 보였겠다."
"아닌데? 그냥도 보인다고 선생님이 그냥 보라고 하셔서 그냥 봤어."
'...... 엥? 그냥 봤다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도 나도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두 눈에 의지해서 섬광을 본 거였다. 천문대에 갔으니 당연히 천체망원경으로 봤으리라는 내 선입견을 단숨에 깨 준 아들의 말 한마디에 오늘도 또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의 마음에 비하면 자연은 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순리를 따르며 조화롭다.
아들이 현관문을 여는 순간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굵은 빗방울이 창을 적셨다. 아들아이가 비에 젖지 않고 귀가해서 감사하고, 아이와 함께 누워 창 밖의 하늘과 빗줄기를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밤하늘이 행복감을 더해준 주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