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새벽 기상을 ‘수면 시간을 담보로 얻어내는 고통스러운 성과’처럼 여깁니다. 깨어 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잠을 줄이는 것은 단기적인 승리일 뿐입니다. 이는 미래의 자신에게 현재의 에너지를 도둑맞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새벽을 원한다면, 그 시작은 ‘일찍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 잠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가장 강력한 선물이자 ‘스토아적 투자’입니다.
늦은 밤까지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소셜 미디어를 탐닉하고 무의미한 영상을 시청하는 것은 다음 날 새벽의 통제력을 미리 포기하는 일입니다. 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경계했던 통제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불필요한 염려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 제7권 제8장에서 다가올 미래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 염려하지 마라. 당신이 그때 겪게 될 모든 일들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 이성으로 능히 처리할 수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핵심은 ‘미래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사용하고 있는 이성이 얼마나 건강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밤잠을 희생하며 이성을 피로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미래의 ‘나’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도록 이성과 집중력을 훼손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른 잠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명료한 이성’이라는 선물
이른 시간 잠자리에 드는 것은 단순히 수면 시간을 확보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충분한 수면으로 맑아진 정신, 이는 곧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명료한 이성’이라는 선물입니다. 졸음과 싸워야 하는 새벽은 ‘고난의 시간’일 뿐, 주도적인 ‘생산의 시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은 ‘수면 시간의 희생’이 아닌, 깨어 있는 시간의 질을 극대화하기 위한 ‘투자’입니다.
충분한 수면을 확보한 상태에서 맞이하는 새벽은 불안하지 않습니다. 마르쿠스의 말처럼, 명료해진 이성으로 능히 새벽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러한 확신의 다른 이름은 ‘평온함’입니다. 이른 잠을 통해 미래의 ‘평온한 새벽’을 미리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미 몇 차례 이야기했지만, 스토아 철학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할 것을 강조합니다. ‘언제 잠자리에 들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즉. 자기 통제 영역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른 잠은 통제 가능한 ‘잠의 선택’을 통해 미래의 나에게 ‘명료한 이성’을 선물하는 실천적인 스토아 철학인 것입니다.
새벽 기상을 통한 주도적인 삶을 원한다면, ‘늦은 밤의 즐거움’과 단호하게 결별해야 합니다. 이른 잠을 통해 평온한 새벽을 맞이함으로써, 다가올 난관을 극복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일으키는 새벽의 힘>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초등학교 1학년 딸아이가 잠투정하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책을 꺼내와 읽는가 하면, 배가 고프다며 야식거리를 찾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아빠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긴 서사를 풀어냅니다. 그 모습이 마냥 귀엽다가도 다음날 가족의 평온한 일상을 위해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딸, 이제 자야 할 시간이야. 늦게 자서 피곤하면, 내일은 조금 덜 신나는 하루가 될지도 몰라.”
그러자 딸아이가 시무룩해하며 대답합니다.
“아빠, 일찍 자면 왠지 속상하단 말이야.”
아이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늦은 밤에 먹는 치킨과 맥주 한잔은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본방송으로 시청하는 드라마는 묘한 쾌감을 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런 것을 과감히 포기함으로써 내일의 새벽은 더없이 맑아진다는 것을.
더 놀고 싶다는 아이를 꼭 안아줍니다. 사실, 어린아이의 삶은 대부분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느끼고 싶은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즉, 스스로 통제 가능한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도 언젠가 아이가 깨닫기를 바랍니다. 충분한 잠은 미래의 ‘나’에게 명료한 이성을 선물하는 일이자, 불확신한 인생에서 ‘자기 믿음’을 심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