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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으신데 좀 부담스러워

by 뇌팔이
나는 어릴 때 운동회 날이 제일 싫었다.
운동에는 잼뱅이어서 달리기도 꼴등, 피구도 꼴등, 줄넘기도 꼴등이었기 때문에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을 하루 종일 하는 운동회 전날에는 내일 비가와라 기도하고, 배탈이라도 나기를 기대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아이들도 운동이라면 눈썹부터 찌푸린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환장하는 첫눈 오는 날도 눈사람 만들러 나가자고 통 사정을 해서 데리고 나가봤자 반시간을 못 버티고 집에 가자고 손을 턴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느즈막히 운동을 시작해서 재미를 붙이고 나니 더 어릴 때 즐기는 스포츠 하나 만들지 못 한것이 못내 아쉬운지라 늘어지는 아이들을 끌고 이것 저것 경험은 시켜주려고 하는 편이다. 발레도 시켜보고 클라이밍도 시켜봤는데 그나마 살아남은 것이 수영이라 그래도 그것만은 꾸준히 해보자고 매주 수영강습을 듣는다. 수영의 또 다른 장점은 두 아이를 한꺼번에 풀장에 들여보내고 밖에서 지켜보는 시간이다.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얌전하고 움직임이 적은 아이들이라 워터파크에 데려가도 크게 체력소모가 없는데 한시간짜리 수영강습은 온전히 성실하게 근육에 의존하는 시간을 갖는 것 같아 부모로서의 작은 성취감마저 든다.


1년 넘게 수업을 듣다보니 수영코치가 몇번 바뀌었는데 이번에는 아주 다정하신 여선생님이 배정되었다. 그런가보다 하고 여느때처럼 수업이 끝나고 아이 머리를 말리느라 대기실에서 드라이기를 흔들어대는데 인상 좋은 여자분이 상당히 반갑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대기실에서 꼬박 한시간 아이를 기다리며 다른 학부모들과 1년 넘게 시간을 보냈지만 단 한번도 다른 학부모와 인사를 나눈적이 없으므로 누가 다가오며 인사를 하는 것이 의아했다. 내 표정이 너무 투명했는지 여자는 멋쩍게 웃으며 새로 온 수영선생이라며 자기를 소개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부모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아이에 대한 잡담도 하고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게 마련일텐데 나는 그런 생각이 하루 이틀 지나야 스물스물 피어난다. 언제나처럼 한창 버퍼링이 걸려있는 상태에서 정적이 흐르자 언뜻 어색하게 웃으면서 잘 부탁드린다고 사람좋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에 주춤주춤 나도 따라 인사를 하면서 상황이 마무리 되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 모습이 서글퍼 보였는지 아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엄마, 새로오신 선생님은... 말하는 건 재미있으신데 좀 부담스러워.


그 순간에는 10살 짜리 아이가 부담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이 너무 우스워서 크게 웃고 말았는데 생각할 수록 부끄럽고 미안하다. 선한 마음으로 자기 학생의 보호자에게 성의를 보였는데 아이 엄마라는 사람이 멀뚱한 얼굴로 눈웃음 한 번 지을 줄 모르다니. 게다가 아이의 미성숙한 감정 표현을 제대로 바로잡아주지도 못한 못난 엄마라니. 아이에게 지워지지 않는 어떤 표식을 남기고 말았다는 생각에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물론 이 사고 과정도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나서야 정리되어서 혼자 뚱하게 되짚어볼 뿐 어떤 액션을 취하기에는 늦었고.


낮에는 작은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 친구와 어울려 놀았다. 타고난 성격이 느긋해서 행동도 느리고 조심스러운 아이라 친구와 어울려 두시간 남짓 노는 동안 열번은 울었나보다. 자꾸 울어대는 것이 재미졌는지 친구도 연신 똑같은 패턴으로 장난을 걸고 그러면 또 여지없이 우리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몇개나 널부러져 있는 공을 하나 주웠다가 친구가 낚아채가면 다른 공을 주워오고 그것마저 빼앗기면 순하디 순하게 하나 빌려달라 말을 꺼내다가 거절당하면 영락없이 눈물이 터졌다. 되도록 아이들끼리 놀 때는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라 지켜보기만했는데 돌아오는 차안에서 은근히 화가 차올랐다.

아가야, 친구가 너를 속상하게 하면
큰 형님처럼 큰 목소리로 그러지 말라고 말하자.


물론 나도 막상 불편한 상황이 닥치면 당황하거나 긴장해서 제대로 대응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하루 이틀쯤 지나서 소심하게 이불킥이나 하지..


엄마가 되고 보니 그렇다. 아이들에게 유전자 이상의 어떤 것을 오랜 세월 공들여 물려주게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도 모르게 내가 평생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 남들과 구분되는 표식이 되어 아이들에게 남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된다.

내일은 꼭,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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