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또는 과거에게,
생각이 자유롭고 사람들이 서로 다르며 혼자서 살지 않는 시대에게
진실이 존재하고 한번 벌어진 일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 시대에게
세상이 시끄럽다. 언제는 안 그랬나 싶지만서도 매번 전혀 새롭게 놀란다.
곡괭이, 호미 들고 농사짓던 농경시대에서 멀리도 왔건만 문득 아직도 숟가락으로 하루 세번 밥먹는 모양새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전혀 이상하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 어찌보면 당연하고 어찌보면 경이로운 것이 삶인가보다. 어제와 오늘을 경계지을 것이 지극히 하찮은데도 보신각에서 종을 몇 번 울렸기 때문에, 새로운 달력이 인쇄되었기 때문에, 며칠 전부터 새해 운세를 찾아봤기 때문에 내일은 상당히 의미있는 새 날이 된다. 서로 한살을 더 먹었다고 각인시키고 하룻저녁에 일년이 다 지나간듯 지나간 열두달을 한번에 퉁치며 골로 보내는 덕담을 주고 받으면서.
매년 연초에 새해 목표를 세우는데 일년 내내 그 계획을 들춰보는 일도 거의 드물다가 새 계획을 세워야할 즈음에 다시 열어보고 놀라곤한다. (매년 빠짐없이 놀란다.) 작년 계획을 들여다 보노라면 겨우 1년 전 기록인데 전혀 새로워서 놀라고 그 중 몇몇은 결코 의도치 않았는데도 더러 이루어져있는 것이 있어서 더욱 놀란다. 조깅을 하겠다거나, 세계사 공부를 하겠다거나 하는 식의 계획들은 적어두고는 작심삼일은 고사하고 돌아서자마자 기록한 사실조차 잊어버리는데 연말이 되어 돌이켜 보면 나도 모르게 전에 없이 고전 소설을 즐기고 있다거나 몇년 째 책장에 처박아 뒀던 벽돌책을 읽고 싶어졌다거나 (심지어 다 읽었다거나!) 평생 상상도 안 해본 마라톤에 출전을 해봤다거나 하는 식으로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2024년 이전의 삶을 돌이켜 볼때 소위 ‘내 성격에’ 절대 원하지 않을 법한 일들이라는 것을 그때야 자각하게 되고 그 전까지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던 이상한 일들이 비로소 이상하게도 설득력을 갖게 되는 이상한 경험이다.
얼마전 한강 작가가 과거는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물었다. 죽은 자는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내가 있는한, 그렇다고 답해야한다. 내가 기록한 과거를 살아온 내가 현재에 맞닿아 있기 때문에 과거를 신뢰할 수 있고, 미래를 응원할 수 있다. 어제와 오늘을 가르는 그 어떤 장벽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의 약속에 따라 한명도 빠짐없이 다같이 한살 더 먹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지난 열 두달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고 이 시대를 구성하는 어떤 기록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사실대로 기록되어 서로의 자유의지가 살아 있는 채로 공동의 기록을 해왔기 때문이다. 기록이란 때로는 이런 힘이 있다. 기록은 늘, 언제나 과거이므로.
흔히 과거는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하늘이 돈다고 말하던 중세의 모든 사실은 대항해 시대와 함께 잊혀져 갔고 왕정시대의 유물들을 르네상스의 물결에 씻겨 내려갔다. 방대한 기록으로 포장된 사실을 무너뜨린 것은 언제나 개인의 신념이었다.
이렇게 멀쩡히 눈뜨고 지켜본 일들도 언젠가는 다르게 기록될지 모른다. 지금은 우리가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며 현재를 지키고 있지만 언제라도 조금 긴장을 늦추면 아주 조금씩 과거가 되고 잊혀지고 퇴색되고 변색될지도. 긴장이 계솓되다보니 슬쩍 윈스턴이 이해가 된다. 다이얼이 달린 침대에 누워 2+2가 5일 수도 있겠다 싶어진 순간. 신념이 흐릿해진 순간.
극한의 공포와 고통이 그저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게 되는 순간.
조지 오웰은 윈스턴의 메모에 기대어 미래로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획일성의 시대에서
고독의 시대에서
빅브라더의 시대에서
이중사고의 시대에서 인사를 보낸다.
안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