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딩인생
일을 그만 둔지 3년 째, 이제 햇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 하게 이 생활에 익숙해진 것 같다. 아이들과 하루를 지세우고 일주일을 보내고 한달을 사는 일이 평온하고 온건하게 느껴지니까. 불과 2년 전까지만해도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느라 수명을 깎아가며 살았는데 이제는 남겨진 5분, 10분에 옹색하지 않을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창밖에 텅 빈 도로를 바라보기도 하고 대낮에 한시간씩 욕조에 누워있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벗어던진 옷가지를 바로 치우지 않아도 마음이 조급하지 않다. 조금은 어지러진 거실과 흐트러진 싱크대를 뒤로 하고 뜨거운 커피잔과 함께(워킹맘은 늘 식은커피와 함께였다!) 거실 화분들 사이를 오가며 여유를 부릴 수도 있다. 오롯이 생활의 무게를 견디는 외벌이 신랑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내 삶에 깃든 충만함이 그만큼이나 달콤하다.
워킹맘으로 아이를 키우는 동안은 육아도 일처럼 to-do list가 있었다. 놀이동산에 데려가서 퍼레이드 체험도 시켜주고, 방학 때는 함께 해외여행을 가고, 따뜻한 봄이면 한복입고 고궁나들이도 가야지. 거창하지 않지만 꼭 해주고 싶은 것들. 시간이 나면 망설임없이 하나씩 지워나가며 뿌듯해 하던 일들이었다. 그래서 돌이켜 생각하면 첫 아이와는 추억이 정말 많다. 지방 축제에도 데리고 다니고 생일 때마다 조부모님들 모시고 호텔에서 드레스 입고 파티도 하고 기념일마다 스튜디오에서 앨범 촬영도 하고... 나열하고 보니 남들 하는 것은 다 해줬다 싶다. 그에 비하면 둘째는 서럽기 짝이 없다. 코로나 베이비인지라 사회적으로 고립된 점도 있지만 그 이후로도 누나만큼의 호화로운 유년기를 보내고 있다고는 못 하겠다. 어쩌다 키즈카페만 가도 대단한 이벤트니까.
전업주부가 되고 1년간은 아이들과 여행을 많이 다녔다. 일하느라 바쁜 아빠는 떼어놓고 그동안 아이들에게 진 빚이라도 갚듯이 혼자 억척스럽게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강원도며 경주까지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직 아이들 준비물이며 숙제 챙기는 일도 미숙했고 매일 조금씩 다른 두 아이 학원 스케줄 맞추기도 정신이 없었다. 늘 잊어버리고 툭하면 늦거나 틀렸다. 그렇게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익숙하지 않은 루틴에 끌려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거창한 이벤트를 생각해낼 겨를이 없어졌다고 하면 변명이 될까. 이번에는 아이 생일도 어찌할까 고민만 하다가 시간을 흘려보내서 전날밤 발을 동동구르며 새벽배송에 매달리기도 했다.
타인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스스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매사에 치열하고 조급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그만큼 모질게 대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자연히 느긋하고 조용한 사람은 스스로에게 관대할 할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풀타임 엄마가 된 이후에는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이 변한 것을 느낀다. 숙제하듯 아이와 해야할 일을 생각해내지 않고 거창한 계획도 세우지 않는다. 그저 아이가 리드하는 대로 오늘이 흘러가도록 두는 날이 많아졌다. 하루쯤 학원에 가기 싫은 날 꾀병을 부리면 나란히 거실 바닥에 배깔고 누워 보드게임도 하고 과일도 깎아 먹는다. 단원평가에서 백점을 맞은 날은 아이가 좋아하는 싸구려 머핀빵위에 생크림을 얹어서 만든 케잌을 식탁위에 펼쳐놓고 백점파티도 연다. 손톱만한 백점 꼬리표를 냉장고에 붙여놓고 촛불을 끄는 게 전부인데도 아이는 호텔파티 때보다 더 싱그럽게 웃는다. 그런 순간들이 내 허기진 속을 사부작 사부작 알차게 채워넣고 있다.
삶의 어느 시기보다 더 행복한 요즘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들은 더없이 사소한 것들이다. 예쁜 말을 해줘야지. 더 많이 이야기 해줘야지. 더 많이 안아줘야지. 어부바해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말아야지. 아이가 속상한 날은 진심으로 같이 울어줘야지. 가끔 밥은 시켜먹더라도 간식은 꼭 내 손으로 해줘야지. 날씨가 좋은 날은 조금 일찍 나가서 학교가는 길을 빙 둘러 손잡고 동네 꽃밭구경하면서 바래다 줘야지. 얼마나 기분좋은 깜짝 이벤트야!
라이딩 인생은 즐겁고 충만하다. 차에 타자마자 귤 한개, 감 한개 담긴 간식박스를 신나게 열어재끼는 아이와 함께 짬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나는 기꺼이 내 하루를 소분해서 사용한다. 덧없는 연애를 할 때도 열한시까지 야근하고 30분 얼굴보려고 한시간씩 지하철 타고 가서 상봉하던 추억이 생생하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이 얼마나 관대한 행복인지. 오늘 하원길에는 둘째가 놀이터에 가고싶다고 할 것이다. 때아니게 눈이 와서 분명히 집에 가기 싫다고 때를 쓰겠지. 안될 것 없잖아. 눈쌓인 미끄럼틀을 쏴-내려와서 한바탕 지저분하게 놀고 젖은 엉덩이를 붙잡고 집에 오는 길이 또 얼마나 신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