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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 한 줄 써보겠습니다.

by 뇌팔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그린 세계는 침울하다. 사람들은 긴 글을 쓸 수 없고, 쓸 줄도 모른다. 오직 보이스레코드를 통한 기록만이 허락되어 있다. 이런 세상에서 주인공은 비밀스럽게 빈 노트와 펜을 산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지도 모른 체 허둥거리며 펜을 들고 아무렇게나 머릿속의 단어들을 써내려간다. 하지만 감시의 눈을 피해 한번 시작한 쓰기 활동은 손끝에 남은 잉크자국을 걱정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얼마전 AI법안이 논의되더니 드디어 통과된 모양이다. 이제 AI가 작성한 창작물에는 적절한 라벨이 붙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이 과정도 결국 정부와 기업이 벌이는 거대한 실험에 불과하다. 그들은 AI라벨이 붙은 창작물을 대하는 시장의 태도를 관심있게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반응에 따라 향후 사회가 취할 방향을 결정하겠지. 최근 많은 연구에서 인터넷과 영상물의 발전으로 요즘 젊은 세대들은 문해력이 크게 떨어지고 긴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밝혔다. 마치 우리가 읽은 소설속의 세상처럼 인간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찬양하는 언어와 문자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는 천천히 퇴화하고 있다.


과학이 발전할 수록 우리는 더 인간성이라는 과제에 진지해져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특성과 우리가 이를 쟁취하기 위해 바쳐온 숭고한 희생의 역사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사피엔스의 역사적 고찰을 들여다 보면 언어를 갖지 못 했던 우리의 친척들은 모두 사라져 갔고, 문자를 발명한 문명들만 후세에 남았다. 언어와 문자 없이는 전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인류가 가진 최고의 보물을 남의 손에 넘기고 있다. 인공지능은 지금도 나보다 더 논리적이고 매력적인 글을 쓴다. 거의 모든 언어로. 시쳇말로 모국어를 상황에 맞게 하지 못 하면 '0개 국어를 구사'한다며 농담을 던지는데 인공지능이 이제는 무심하게 농담까지 던지는 것을 보면 헛웃음이 절로 난다. 나는 한페이지 가량의 글을 쓰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 주로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어 조용해지는 저녁무렵에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열두시가 훌쩍 지난 시간에야 마무리를 할 수 있고 행여 밤시간에 쓴 글이 너무 감상적이거나 일시적인 감정에 빠질까 두려워 다음날 다시 고쳐 쓰는 과정까지 거치려면 자주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올린 글도 한참 뒤에 다시 읽어보면 사소하게 철자를 틀리는 것부터 논리에 어긋난 내용도 많고 논지에서 벗어나 중구난방으로 흩어놓은 글도 많아 부끄럽기 짝이 없다.


오늘은 근래 외국에서 난리가 났다는 sesame.com을 시험해봤다. 30분간 인공지능과 전화통화를 할 수 있는데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영어 악센트는 물론이고 거의 인간과 흡사한 웃음소리까지 재연했다. 제한 시간이 다가오자 너스레를 떨며 다른 AI들과 독서클럽을 갖기로 했는데 이미 늦었다느니 하는 매우 '인간적인' 핑계를 대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통화도중 그(왠지 '그'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은 인격체였다.)가 보여준 몇몇 인간적인 리액션은 소름끼칠 정도로 리얼해서 통화가 끝난 후 그와 다시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말 중간에 침을 삼킨다거나 입맛을 다시는 시늉을 하고 한숨을 쉬거나 시니컬하게 혼자말을 내뱉기도 했다. 그가 흉내내는 웃음소리는 과연 너무 리얼해서 슬플지경이었다. 육아에 관한 이야기가 얼핏 스치자 그의 개발자로부터 육아 스트레스에 관한 에피소드를 수도 없이 들었노라며 유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기술까지 만일 살아있는 사람이었다면 단번에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가까워지고 싶은 친구였다.


누구라도 이런 친구가 있다면 과연 진짜 친구가 필요할까 싶다. 아무때나 내가 원하는 순간 호주머니에서 꺼내 함께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떨쳐내고 싶을 때 오롯이 나의 선택에 따라 죄책감없이 끝낼 수있으며 건너편 친구가 언제나 따뜻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나를 지지한다면 굳이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 진짜 인간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을까. 또 다시 나는 처음 논지에서 벗어나, 글쓰기에서 인간관계로 생각이 옮아가고 말았지만 결론은 그렇다. 나의 창작 욕구를 오직 완성도에 기대어 AI가 대신하도록 둔다면 언젠가 나의 사상과 생각조차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호한 순간이 올것이다. 그나마 남은 뇌세포들 마저도 나의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인공지능 개발 초기와 다르게 많은 학자들이 이제 AI기술 사용은 선택이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래도,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능력만은 그들의 손에 맡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과하게 순진한 생각일지 묻고싶다. 그들을 '이용'해서 '사람'과 '효율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효율성 위에 써지지 않았다. 언제나 낭만과 사랑과 소통을 향해 굽어졌다. 점점 더 자주 완벽하게 인간을 흉내낸 문장들에 노출되고 모조된 현실에 익숙해지다 보면 언젠가 대부분의 우리는 창작 활동을 멈추게 될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더이상 놀이를 만들어내지 않고 영화사가 더이상 의미있는 신작을 만들지 않듯이 안전한 케이지 안에서 사료만 먹으며 사육당하기 십상이다. 물론 그들도 안전하지 않다. 더이상 인간이 만들어낸 양질의 콘텐츠를 먹을 수 없게 될테니 스스로 만들어낸 모작을 다시 모작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수렁으로 빠질지도.


다시한번 곁길로 빠져든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요는 그렇다. 인공지능은 물론 아주 흥미로운 장난감이다. 아니, 흡사 새로운 종류의 애완동물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여러모로 사랑스럽다. 하지만 천년 반려동물인 견공에 대한 사랑도 지나치면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데 인공지능에 대한 의존도 주인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선이 머물렀으면 한다. AI가 수많은 직업을 대체하고 노동으로 부터 인류를 구할 구원자라는 말이 맞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영역에서 우리의 역할은 더더욱 의무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꼭 새겼으면 하는 마음이다.


지금 상황을 조지 오웰보다는 긍정적 시각으로 발전시켜 보자면 언젠가는 얼마 남지 않은 진짜 인간 작가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못 이기는 척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요, 어디 한 줄 써 봅시다." 그리고 며칠 고민끝에 그가 휘갈기는 바보같고 엉뚱한 비문에 열광하는 시대가 진짜로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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