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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토스머프 Oct 08. 2021

간사이関西와 간토関東의 목욕문화 차이

일본의 문화와 관습은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간사이関西와,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간토関東로 크게 나뉜다. 

에도시대의 지리, 풍속, 의복 등에 대한 기록으로 「모리사다만코우守貞謾稿」라는 일종의 백과사전이 있다. 저자인 키타가와 모리사다喜田川守貞(1810~?)가 약 30여 년간 그가 경험한 다양한 풍속을 1600여 점의 그림과 상세한 해설을 포함해서 에도(지금의 도쿄), 교토, 오사카의 특징 등을 비교해 가며 저술한 책인데. 일본의 근세 풍속사를 연구하는 이는 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기본 문헌이다. 여기에  「京坂ニテ風呂屋ト云イ、江戸ニテ銭湯アルヒハ湯屋ト云フ」라고 쓰여 있는데 ‘오사카와 교토에서는 후로야風呂屋라고 부르고, 에도에서는 센토銭湯 또는 유야湯屋하고 불렀다’라는 내용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명칭은 센토(목욕탕)로 통일되었지만 목욕탕의 외관, 내부 구조, 목욕문화는 간사이와 간토가 다르게 발전해 왔다. 


도쿄 목욕탕을 대표하는 2가지 특징 미야즈쿠리와 페인트벽화


일본의 목욕탕을 소개하는 글이나 사진에는 신사, 사찰 건축 양식을 채용한 멋진 목욕탕 건물과 욕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페인트벽화가 자주 소개된다. 이것은 도쿄 목욕탕의 특징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일반적이지 않다. 


 도쿄의 목욕탕은 미야즈쿠리宮造り라고 해서 신사나 사찰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 많다. 이는 1923년 일어난 관동대지진 이후에 생겨난 도쿄 목욕탕의 특징이다. 당시 화재로 도쿄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목욕탕도 마찬가지다. 불 타 없어진 터에 목욕탕을 새로 지을 때 상심한 사람들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주고자 지금까지 밋밋하였던 목욕탕 건물을 근사하게 지었다. 사찰이나 큰 성에 있는 천수각 같은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카라하후唐破風 양식 등을 목욕탕 건물에 도입하였다. 이 양식으로 지어진 목욕탕이 호평을 받자 도쿄의 많은 목욕탕들도 이 양식을 따르기 시작해 도쿄 목욕탕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교토에도 쵸우쟈유長者湯, 야나기유柳湯(2021년 폐업)처럼 미야즈쿠리宮造り 양식으로 지은 목욕탕이 있지만, 대부분 평범한 건물에 목욕탕이 들어서 있다. 교토 이외에 간사이지역에서 미야즈쿠리 양식으로 지은 목욕탕은 1923년 지은 효고켄兵庫県 아마가사키시尼崎市의 다이이치시키시마유第一敷島湯가 유일하다.


 도쿄의 목욕탕 하면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것이 욕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히 채운 후지산을 그린 페인트벽화이다. 도쿄 관광홍보 자료에 빠짐없이 등장할 정도로 도쿄를 대표하는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이 페인트벽화를 제일 먼저 시도한 목욕탕은 도쿄 치요다쿠에 있던 키카이유キカイ湯(1971년 폐업)다. 아이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목욕탕에 올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던 키카이유의 주인장이 아무 장식이 없던 삭막한 욕실의 벽면을 그림으로 채우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화가인 카와고에 고-시로-川越広四郎에게 그림을 의뢰했는데, 시즈오카켄静岡県 카케가와시掛川市 출신이었던 이 화가는 고향에서 바라본 후지산을 그렸다. 일본의 상징이면서 신앙의 대상이기도 한 후지산을 바라보며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글 수 있다는 것은 꽤 매력적인 일이었다. 이 페인트벽화가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늘어나자, 다른 목욕탕들도 욕실에 페인트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가 1912년의 일이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는 1939년 발표한 단편 “부악백경富嶽百景”에서 야마나시켄山梨県의 미사카고개御坂峠에서 바라본 후지산을 “이것은 마치 목욕탕의 페인트벽화다”라고 묘사하였다. 이 문장으로 보아, 1930년대에 이미 도쿄 목욕탕에 후지산 페인트벽화가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간사이와 간토의 목욕문화 차이

     

반다이의 높이


욕객 수가 많았던 도쿄의 목욕탕은 내부가 넓은 편이다. 그래서 탈의실의 구석구석까지 살펴볼 수 있도록 반다이를 조금 높게 만들었다. 반다이가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높은 곳도 있다. 목욕탕의 탈의실에서 도난 사고도 빈번하게 일어나서 이를 적발하기 위해 반다이를 높게 만들었다고 하는 이도 있는데, 이 견해에 따르면 동네 치안이 안 좋을수록 반다이가 높아진다고 한다. 

     

욕조의 위치


 욕조가 간사이는 욕실 중앙에, 간토는 욕실의 가장 안쪽 벽에 있는 곳이 많다. 이는 목욕 순서와 관계가 있다. 간사이에서는 욕조에 들어가서 몸을 충분히 데운 후 씻는데 반해, 간토에서는 먼저 몸을 씻은 후 욕조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런 구조가 정착되었다. 욕실 입구에서 욕조에 이르는 중간 구역에 씻는 곳이 있다. 일본 드라마 “낮의 목욕탕과 술” 오프닝에 도쿄 목욕탕 구조의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욕실의 문이 열리며 맥주잔을 든 아주머니가 나체로 씻고 있는 남자들 사이를 지나 후지산이 그려진 페인트벽화를 배경으로 욕조에 걸터앉아 있는 주인공에게 맥주잔을 건네는 이 오프닝을 보면 도쿄 목욕탕의 전형적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목욕 바가지의 크기


 목욕 바가지를 광고수단으로 활용해 톡톡히 덕을 본 회사가 있다. 나이가이야쿠힌内外薬品이라는 제약회사인데, 케로린ケロリン이라는 상품명을 바닥에 새긴 목욕 바가지를 제작하여 대 히트를 쳤다. 1963년 도쿄역 지하에 있던 도쿄온센東京温泉에 시험 삼아 도입해 보았는데 광고효과가 아주 좋았다. 그래서 일본 전국의 목욕탕에 이 목욕 바가지를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사카에서 이 바가지가 좀 크다는 지적이 있었다. 


 간사이에서는 욕조의 물을 바가지로 퍼서 몸에 끼얹은 후 욕조에 들어간다. 그리고 욕조의 바깥쪽에 앉을 수 있도록 단이 만들어져 있어, 여기에 앉아서 욕조의 물을 퍼서 몸을 씻는다. 목욕 바가지가 크면 한 손으로 욕조의 물을 떠서 끼얹는 것이 힘들다. 손목도 아프고. 간사이의 이 목욕문화를 이해한 업체는 간사이용으로 크기가 작은 목욕 바가지를 만들었다. 이 회사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A형은 간토용으로 무게 360g 지름 225mm 높이 115mm, B형은 간사이용으로 무게 260g 지름 210mm 높이 100mm로 각각 다르다. 


욕조의 온도

     

욕조의 온도가 간사이는 40도 전후, 간토는 42도 전후로 좀 높은 편이다. 육체노동자가 많았던 에도시대부터 고온의 욕조에 몸을 담가 피로를 풀었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일설에는 에도시대 당시 욕조의 온도가 약 47도라고 한다. 이렇게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몸이 빨갛게 될 때까지 참으며 옆의 사람에게 "물이 좀 미지근하지 않아?"라고 말을 거는 게 에도 사람이 목욕탕에서 하는 허세였다고 한다.

 욕조의 온도 차이로 인해 간사이 출신이 도쿄 목욕탕의 욕조에 들어가기 위해 발을 들여놓았다가 너무 뜨거워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는 종종 회자된다.


이렇게 간사이와 간토의 목욕탕과 목욕문화는 다르다고 알려져 왔지만, 지금은 그 차이가 많이 희석된 것 같다. 간사이 지역에서 중앙에 욕조가 있는 목욕탕은 이제 몇 남지 않았다,  나이 든 어르신들 중에 그런 분들을 몇 분 보기는 했지만, 욕조의 물을 바가지로 퍼서 이용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리고 욕조도 열탕, 온탕 등 온도를 다르게 만든 곳도 많이 늘어서 물 온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옛이야기가 된 것 같다.


 20세기 초 일본의 식민지가 된 우리나라와 대만에도 일본의 목욕문화가 들어왔다. 대만은 간토, 우리나라는 간사이 양식이 전파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유입된 일본인들의 출신지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내가 어릴 때의 목욕탕을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 간사이 양식이 들어온 것은 확실히 맞는 것 같다. 욕실의 중간에 놓인 커다란 욕조 주위에 둘러앉아 거기서 때도 밀고 씻고, 바가지로 욕조의 물을 퍼서 씻은 기억이 난다. 어른들이 그 뜨거운 욕조의 물을 떠서 나에게 끼얹는 게 너무 싫었었다. 그래서 기억에 오래 남아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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