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전에 나는
'UX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진로로 삼았었다.
그게 무슨 직업이냐 하면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이제 와서 설명하기도 머쓱하지만
정말로 이제는 잘 모르는 일이 되어버렸다.
현직에 종사하는 분들이 듣고는 풉 하고 비웃을 답변만 떠오르니 이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삼가기로 한다.
아무튼 그래서 IT 관련 회사에서 몇 번인가 면접을 보곤 했는데 한 회사의 최종 면접 때 들은
다른 지원자의 대답이 아직도 종종 떠오른다.
최종 면접에서는 나를 포함하여 세 명의 지원자가 있었다.
임원진과 보는 면접이었는데 사장으로 보이는, 가운데 앉은 근엄한 중년 아저씨가 이런 질문을 했다.
“인간의 인생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본인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이게 UX 디자이너를 뽑는 데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생관에 대한 질문을 받은 것이다.
당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심취해 있던 나는 인간의 생이란 시시포스Sisyphos가 끊임없이 굴러오는 돌을 자꾸만 굴려 올리듯
삶도 뭐 그런 것이니 돌이 굴러오면 열심히 이를 굴려 올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별 이상한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지원자가 인생관이고 나발이고 UX 디자이너로서의 포부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아차 싶었다.
나도 이 분야에 대한 포부를 인생을 걸고서라도 말했어야 했던 것인가!
내가 시시포스의 바윗돌 운운했던 것을 후회하며 무릎을 찌르고 있을 때였다.
마지막 지원자가 “자려고 누웠을 때 아무 걱정이 없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는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냥 저 말만 기억에 남았고 이후의 몇 분간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면접이 끝나고 셋은 쪼르르 나와서 서로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가볍게 작별 인사를 했고 우리는 면접비로 2만 원이 든 봉투를 들고 빌딩을 나왔다.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는 회사였기에 나는 시시포스와 여자의 마지막 말을 되새김질하며 털레털레 집으로 걸어갔다.
받은 2만 원 중 5천 원을 분식집에서 썼고
집에 돌아와 떡볶이와 순대를 엄마와 나눠 먹으면서 면접은 망했노라고 말씀드렸다.
먹은 자리를 치우며 나는 수많은 밤, 누웠을 때 천장에 그렸던 많은 불안과 걱정 들을 생각했다.
정말 단 하루도 나는 아무 생각도 걱정도 상상도 없이 자본 적이 없었다.
내가 3등신, 5등신이던 꼬마 시절을 제외하고는
모든 밤을 걱정으로 조금씩 수놓다가 지치면 잠이 들었다.
하지만 밤마다 수놓았던 걱정은 절반도 현실화되지 않았고 불안에 떨었던 것의 절반만큼도 나는 괴롭지 않았다. 좀 억울했다.
그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잤으면 키가 3센티는 더 컸을 텐데.
그날 밤엔 내가 면접에 합격했을까 아닐까,
내가 이 사회에 쓸모나 있는 인간일까 하면서
엄살을 피우거나 필요 없는 걱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여자는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 여자가 붙었을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 회사에 떨어졌다.
시시포스의 바윗돌 따위를 말하는 인간은 영 회사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일까.
아무튼 회사에는 떨어졌지만 자기 전에
걱정 없이 자는 날들이 좀 많아졌고 그때마다
‘아, 내가 좀 행복하게 인생의 하루를 보냈구나’하고 자기 위안도 삼고 있으니
(회사에는 못 들어갔지만)
그 마지막 지원자 덕분에 인생 중 조금은 더
만족하게 되는 통찰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은 지금 잠 잘 자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려고 누웠을 때 걱정 없이 잘 수 있는
그런 인생을 그리며 UX를 기획하는 사람이라면 아무튼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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