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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키그레이 Feb 12. 2024

2박 3일 로키산맥 투어[1]

흐르는 기억들

로키산맥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차량이 필요하다.

걸어서 갈 수야 있겠지만… 걸어서 전국일주 횡단하기, 다양한 산들을 등산하기와 같은 낭만은 없다.

더 분명한 것은 그것을 해낼만한 시간도 돈도 체력도 없었고, 아예 걸어서 가겠다는 생각조차 한 적은 없었다.


어쨌든 한국인 교민이 사업 중인 2박 3일 패키지 투어를 신청했다.

나는 내 소중한 ‘멀미약’을 제대로 챙겼는지 확인했고, 아침 일찍 모임 장소로 향했다.


친구 A와 나를 포함하여 한 20명 정도의 한국인인들이 이번 패키지 투어를 함께할 사람들이었다. A와 나는 버스 거의 끝자리에 앉았다. 자리는 넉넉히 남아서 A와 나는 따로 앉았고, 넓게 자리를 차지했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가이드 분은 적절한 유머와 본인과 버스기사님을 소개하고 투어의 일정을 소개하셨다.


나는 곧장 멀미약을 먹었고 버스 이동 기간 동안 깨어 있는 순간은 거의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 약은 멀미약이 아니라 수면제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잠이 들어버렸다. 캐나다에서 차를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데에만 거의 3-4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기절하듯 잠만 잤고, 도착하면 A가 나를 깨웠다. 가이드 분께서 이동하는 순간에 잠을 자는 사람들의 시간이 안타까웠는지 처음엔 잔소리를 하셨다. 여행을 왔는데 밖의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시간이다... 어쩌고 저쩌고 말씀은 하셨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제는 자는 것에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깨어있는 동안 도로 옆으로 쭉 가지런히 늘어진 기다란 나무들을 보기도 했고, 도로 옆으로 걸어 다니는 버펄로를 보기도 했다. 저 멀리 그랜드 캐니언 같은 황토색 산들을 보며 황량한 사막 같은 장면도 기억나고, 하얀 눈들이 내려앉은 푸릇푸릇한 산맥들을 보기도 했다.


"밖에 보이시는 호수를 한 번 봐주세요~"


가이드 님의 말에 따라 창 밖을 내다본 곳엔 자잘한 호수들이 나무들 사이사이에 있었다.


"저 호수 색깔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애매랄드 색입니다."


가이드 님의 말에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저게 애매랄드라고?"


내가 상상한 애매랄드가 아닌 그냥 평범한 초록색 물이었다. 나무의 초록색이 물에 녹아내린 듯 질펀한 느낌이었다. 청량하고 깨끗한 느낌이 아닌 오랫동안 초록색으로 끓인 물 같았다. 다행히 좌석 맨 뒷자리에 앉아있어서 가이드 님께는 들리지 않았지만, A에게는 들렸다. A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하며 나를 찰싹 한 대 때렸다. 그것은 내 기준에서 애매랄드라는 색깔의 범주에 가까스로 끼어들어간 색감이었기에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내가 애매랄드 색깔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물은 애매랄드 색의 물임은 틀림없으니 따져볼 이유는 전혀 없었다.


11월의 캐나다는 눈이 엄청나게 쏟아져 내렸다. 로키산맥에도 눈이 수북하게 쌓였다. 중간중간 호수들에 도착해서 버스에 내리면 살을 에는 추위가 피부를 찔렀다. 덕분에 잠이 확 깰 수 있었다. 눈을 뽀드득뽀드득 밝으며 호수나 강 근처로 간다. 그러면 흐르는 물이 추위를 육지로 밀어냈다. 강으로부터 온 추위를 온몸으로 맞으며, 아주 흐린 하늘이 비추는 회색빛 조명아래에서 멍하니 호수와 강을 바라보았다. 사색에 빠질 법도 할 풍경이었지만, 나는 그저 멍하게 바라만 보았다. 이런 자연을 보고 있다 보면 현실의 내 상황을 되돌아보게 되고는 하는데, 온전히 그 순간을 즐겼다. 


이런 순간들을 떠올리다 보면, 그때의 나는 지금과는 다르게 휴식이나 여행을 참 잘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투어를 하면서 보았던 호수들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도 않았고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자연이 주는 풍경을 오감으로 느끼려고 했다. 굳이 이 풍경을 기억해야 해!, 내 뇌 속에 장기기억으로 담아두어야 해! 하는 집착 따위는 없었다. 선명히 기억하지 않게 되더라도, 이 순간이 언젠간 잊히더라도 아쉬워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순간을 즐긴다고 사진을 막 찍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하면서 아쉬워한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사실 '여행'에 있어서 태도가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여행을 가도 사진을 찍지 않고 깊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연이 만든 풍경과 사람이 만든 풍경을 보고, 자연의 소리와 도시의 소음을 듣고, 풀냄새와 커피냄새들을 맡으며 그저 그 순간을 즐긴다. 


달라졌다면, 내 평소의 일상과 순간의 여행에 사이에 경계가 사라졌음을 느낀다. 조용한 산 길에서도 그냥 걷지 못하고, 일상에서 스트레스받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때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꺼낸다. 일상의 기억들이 내 여행의 순간들에 막 비집고 들어와,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일상의 안 좋았던 기억들도 같이 떠내려온다. 지금 로키산맥의 똑같은 호수들을 보러 돌아 다닌다면, 그때처럼 멍하게 바라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런저런 기억들을 떠올리며 생각하다 보니, 아쉬운 것보다는 지금처럼 불안하고 걱정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여유로울 수 있었던 내가 그리운 것 같다.


멀미에는 여유로울 수 없는 나는 다시 멀미약을 먹고 버스에서 기절했고, 눈을 뜨니 가이드가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그렇게 버스에서 잠을 잤는데도 숙소에 도착하고 씻고 바로 잘 수 있었다.


투어의 첫째 날의 기억은 그때 본 로키산맥의 강물 따라 흘러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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