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에 수줍게 '안녕'
지난 2023년 4월을 되돌아보면 12시간 깨어 있고 12시간 잠들어 있는 생활 리듬에서, 산책을 시작한 후 체력 저하로 12시간에 3~4시간을 더 잠들었으니 최소 15시간 잤다고 치면 하루 9시간 활동 시간이 나온다. 9시간 중 3~4시간 산책하고 앞뒤로 준비 시간 약 2시간을 포함하면, 글쓰기 시간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였을까.
5월, 브런치 북을 발행하고 기력이 소진되어 요양 목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이후로 산책을 자제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산책하고 있지만 병원에서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라 권고했기에 4월처럼 집중, 몰입하며 극한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산책은 하지 않는다. 대신에 정해졌던 산책 경로를 벗어나서 책 한 권을 들고 카페나 음식점에 가는 일이 점점 늘었다.
그리고 집중, 몰입이라 함은 도(道) 안에서의 평안처럼, 몰입 시 접촉되는 '빈 곳'으로 가는 것이며 그 또한 평온이다. 나의 낙(樂)인 독서, 산책, 음악은 그 빈 곳으로 나를 데려가 편히 쉬도록 했다. 건강을 잃으면서 그곳에 접촉할 수 없었던 것은 현재, 지금에만 머물게 해 육체를 탄탄히 하라는 하늘의 배려였음을 이제는 안다.
에너지가 있어야 빈 곳으로 갈 수 있기에.
카페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2019년 이후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건 오랜만이라 굉장히 감회가 새롭다. 카페에 앉아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며 커피 한 모금할 때 전화가 왔다.
함께 일하던 옛 동료(이하 L)의 전화다. 틈만 나면 사업 이야기로 즐거웠던 지난날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로 다정한 사람이다. 엇비슷한 두뇌로 아이디어가 거기서 거기 같지만 다정함을 지닌 그 동료가 한 수 위였다.
함께 일하던 그날도 출근 직후, 어김없이 굉장히 바쁘고 정신없었다. 특히나 매일매일 클라이언트 미팅이 빡빡하게 잡혀 있는 난, 더 정신이 없다. L은 모두가 바쁜 시간에 혼자 여유롭게 책 한 권을 읽고 있었고 바쁜 나의 팔을 살며시 토옥 치며 말했다.
"이 글 좀 봐봐요. 이거 너무 좋다."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란 책을 받아 들고 읽으면서 내가 말했다.
"음, 글이 참 좋네요. 근데 책 표지도 참 이쁘다. 글은 다정하고 표지는 따뜻하네. 꼭 L 같아."
"오늘도 힘내서 파이팅 해요!"라며 L은 주먹을 쥐고 수줍게 말했다. 그 수줍음이 그 책과 그날의 온도와 함께 내게 남았다.
그날에 진행하는 미팅 건건이, 잘 풀리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가 많이 소진되어 이대로 가다간 성과 없이 마무리될 판이다. 그렇게 되면 회사에서 전설의 이미지가 깨지고 그 덕에 살판 날 많은 사람이 생각나니 그러고 싶지 않은데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러니 이만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때 L이 보여줬던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눈에 힘이 들어차는 순간, 수줍고 다정한 아우라가 감싸는 듯했고 그 구절을 이용해 클라이언트에게 마지막 스피츠를 했는데 그게 터져서 매출 00억을 한 번에 일으켰다. 다정했던 L과 다정한 책의 에너지를 받아서였을까. 나 또한 다정해져 읊조렸던 그 말의 위력은 대단했다. L의 덕분이다. 전설의 이미지가 연장되었다.
그렇게 L과 가까워졌다. 가까워졌다는 건 다른 사람은 모르는 나의 모습을 몇몇 가지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회사에서의 난,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고 친절함도 학습된 거라 차디찬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낯가림이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말을 주고받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필요한 말 아니면 말이 없어 무표정에 매 순간 날이 서 있는 날카로운 시선만 있었기에 그런 의미에서 사회에서 만난 사람 중에 L은 특별했다.
야유회, 워크숍, 연수, 회식 등 단체로 몰려다니면서 뭘 하는 게 왜 이렇게 싫을까. 이번에는 연수 겸 야유회를 가게 되었다. 홀로 빠져서 뒤에 있고 싶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그러기도 쉽지 않다. 그렇게 조금은 수긍하고 참여하고 있는데 누군가 말했다.
"어! 이런 것도 있네. 사륜 바이크하고 가자"
모두가 호응하고 있는 거 같아 뒤로 살며시 빠지려 했는데 잡혔다. 사륜 바이크도 싫고 2인 1조도 싫다. 그렇다고 1인 1조도 어렵다. 혼자 타기에는 앞으로 갈 것 같지 않다. 세상 난감한 이 상황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하이에나처럼 이때를 기다린 것처럼 많은 사람이 제각각의 목적을 가지고 나에게로 돌진하고 있는 그 틈에서 L이 말했다.
"J 팀장은 나랑 타요." 다른 사람들과 낯가리는 나를 위해 L이 먼저 배려해 줬기에 안 타겠다 거절할 수 없다.
"그래요."
한평생 침묵과 조용함을 유지했던 내가 큰 목소리로 득음할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목소리를 내질렀을 때의 시원함을 아는가. 그렇다. 그날 득음을 했다.
"으아아악!! ㅎ우헹흐항ㅎ아악!! " 무서운데 재밌다. 재밌는 건지 어이가 없는 건지 자꾸 웃음도 난다.
"사람 없는 데로 가야겠어. 소리 좀 낮춰봐요. 뒤에 사람들 있다니까." L이 내 이미지를 신경 써주며 말했다.
"아ㅎㅎ닉! ㅋㅋ으아악! ㅎ흐헤흐 청천ㅋ흐 으아악" 이미지는 신경 써줬으나 속도는 더 높이면서.
득음하다 침까지 흘리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잠시 정비할 겸 바이크를 멈추었다. 경치가 끝내준다. 멋진 자연을 보니 기분이 상쾌해졌고 바이크에서 내려 헤롱헤롱 헬멧을 벗으며 내가 말했다.
"L 고마워요. 덕분에 정말 재밌었어."
"와, 여기 풍경 좋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있는데 그 책에 숲을 정말 멋지게 묘사하거든요.. " L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내 안색을 살피더니 하던 말을 멈추고 물었다.
"요즘 책 안 읽는 거 같던데 많이 바쁘죠?"
L은 잘 묻는다. 그러다 보니 털어놓는 일이 종종 있는데 책과 독서에 관해서가 그렇다. 여전히 헬멧을 벗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질문에 ..답을 안.. 해. 책이..윽 " 벗겨지지 않는 헬멧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더니 아프다. 그 틈에 L이 말을 이었다.
"질문을 작게 한 거 아네요. 크게 해봐요. 목청 좋은지 오늘 처음 알았잖아."라며 여전히 헬멧을 벗지 못하고 헤롱 대며 허우적거리는 나에게 다가와 헬멧 뒤에 있는 버튼을 눌러 벗겨주면서 L이 말했다.
"그리고 회사 사람들이 뒤에서 말 만들어서 음해하는 거 신경 쓰지 마요. 어차피 이제 믿는 사람도 없어."
그렇다. 사회에서도 괴롭힘은 여전하지만 나 또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도 여전하다. 그렇지만 분명 존재한다. 그 지저분한 곡해가 일을 방해하는 순간들이. 그렇기에 불편함이 없진 않다. 그럼에도 침묵할 수 있는 건 나의 몫임을 알기 때문이며 사람, 인간을 탐탁지 않아 하는 나의 에너지에 되돌아오는 '미움'이란걸 안다.
"알고 있어, 그러다 말겠지, 뭐."
나란히 앉아 푸른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풍경을 한참을 바라보다 L이 헬멧을 다시 씌어주며 말했다.
"질문에 답이 없는 건 잘 못 물어봐서 아닐까. 읽고 있는 책 말고 다른 책들을 한번 골라보면 어때요?"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읽고 있는 책들은 온통 일과 관련된 서적들이다. 나의 질문에 구할 답이 없다. 그래, 그 책들에 구원받을 것이 없다. 어느새 책장을 가득 메운 서적들은 나와의 인연이 아닌 다른 이들의 인연을 골라 담은 것들뿐이니.
"이제 저리 내려가서 사람들하고 합류해야 할 것 같아요. 이번에는 천천히 갈게."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타면서 L이 말했고 L이 운전하는 바이크 뒤에 앉아 조용히 생각했다.
L의 IQ는 높은 편에 속하는데 다정함도 태생적으로 갖추고 있다. 지능이 높아 다정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다정함이 지능을 더 나아지게 할까. 일시적이라도 다정함을 높이고 또 높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어디에 이르게 될까.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하고자 하는 것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래서 당시, 나에게 다정함이란 보류할 목록에 포함되었다.
분별하고 구분하여 온갖 좋은 것은 내 것이 아니기에.
꼭 한번 나와 사업이든 뭐든 같이 일하고 싶다던 L은 나의 암 완치만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이제는 그냥 하는 말이 되었지만. 많이 좋아지고 있는 거 같다고 산책도 하고 책도 읽고 있다며 안부를 전하니 L은 제일 반가운 소식이라며 기뻐해 줬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 서점을 한번 들러서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며 다른 책도 살펴보다 요즘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책을 몇 권 구매해 왔다.
아직 온전한 독서를 하고 있지는 않다. 집중과 몰입이 안 되고 있기에.
그저 글자를 읽는 수준으로 읽고 있음이다.
무엇을 하든, 원하는 거라면, 극한으로 치닫는 집중과 몰입을 자제해야 하는 지금, 무엇을 배우게 될까. 그것은 또 어디에 이르게 할까. 산책도 독서도 원 없이 개운하게 할 수 있는 날이 언제 오게 될까. 그 개운함에도 육체가 버틸 수 있는 날이 가까운 미래에 있길 희망하게 될까. 지난 무지렁이 세월에서의 무엇이 희망하는 오늘에 이르게 했을까.
이토록 수많은 질문에 책은 늘 독서를 통해 답을 해주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마도 L과 함께 풍경을 보던 그때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이미 독서와 멀어져 있었음을. 독서를 통해 집중, 몰입하면 갈 수 있는 빈 곳에서 만나는 존재 또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음을. 존재와 마주한 마지막은 어제였을까. 이제야 시간을 거슬러 기억해 보기로 한다.
기억을 찾는 글쓰기와 독서는, 무엇과 함께할까 생각해 보았는데 '다정함'과 함께 해야겠다.
독서가 나의 질문에 답해주는 그런 날이 온다면
여태껏 하지 못했던 수많은 질문을 다정함과 함께, 한 아름 들고 가야지.
수줍게 '안녕'하며. 이 모든 행위가 '필요'에 닿기를 희망하며.
'일단 독서를 한번 해보겠습니다'는 '일단 산책을 한번 해보겠습니다'의 2편입니다.
이어지는 글이니 혹시라도 산책 시리즈, 1편을 읽지 못하셨다면 먼저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iteuljaesu
그리고
라이킷 & 댓글 남겨주시면 기운이 납니다 :-)
※ 안내해 드립니다. 연재하는 동안 독자분들께 안내 사항이 있을 때를 대비하여 인스타그램을 개설하였습니다. 안내 사항이 있으니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있을재수 | 브런치스토리 작가(@iteuljaesu) • Instagram 사진 및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