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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Jul 14. 2021

신라인들의 성과 가족문화 : 색공(1)

* 참고 : 본 브러치의 글들은 <표류사회 : 한국의 가족문화와 여성 인식의 변화사>(가제) 라는 이름으로 2021년 9월 말 경에 출간되기로 하였습니다. 


| 일본 궁실 서고에서 발견한 숨겨진 역사 |

일제 식민지 시절, 한 역사 선생님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창화. 1933년부터 그는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서 조선 전적 담당 조사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10여 년간, 조선총독부가 우리 땅에서 말살시킨 조선의 비서(祕書)들을 보게 되었다. 그는 틈틈이 중요 도서의 일부를 미리 숨겨 간 종이에 몰래 베껴 나왔다. 그렇게 애써 모은 구깃구깃한 필사본은 훗날 그 가치를 알아본 손주며느리에 의해 정식으로 출간됐는데, 바로 『화랑세기』란 책이다. 이 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던 신라와 너무도 다른 신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문화적 충격이 하도 커서인지 학계에서는 아직도 위작 논쟁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위서이든 진서이든 책의 내용은 묵은 관습으로 단단해진 우리의 굳은 정신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화랑세기』가 전하는 신라의 남녀들은 가식과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랑과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살아갔다. 그 생기발랄함은 관습과 서열화와 차별의 문화로 생기조차 잃어버린 현대인의 삶과 사랑에 많은 질문을 던진다.           


| 신라의 독특한 성문화 : 색공 |

그렇다면 『화랑세기』에 그려진 신라인들의 성과 사랑, 그리고 그들의 가족문화는 어땠을까? 

일단 신라인들은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여성에게도 주체적인 성 결정권이 있었다. 조선식 유교 관념에 익숙한 우리는 아직도 성(性)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매우 남성 중심적이다. 때문에 성을 즐기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하지만 신라의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당당하고 자유롭게 성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남녀가 똑같이 스스로의 성 문제를 결정할 수 있었다. 때문에 신라는 일부일처제와 처첩의 구분이 있었음에도 ‘색공’(色供)과 ‘마복자’(摩腹子)'라는 독특한 풍습이 만들어졌다.      

색공이란 ‘좋은 의도로 성(性)을 나누는 것’이다. 초기에는 여러 첩을 거느린 지도자가 신임하는 신하에게 자신의 첩을 보내 더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도록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첩이란 남첩도 포함된다. 

실제로 드라마 〈화랑(KBS2)〉으로 유명해진 지소태후는 정식 남편 2명과 총애하는 신하 4명 사이에서 9명 정도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자녀 중에 진흥왕, 만호태후, 이차돈, 풍월주 세종은 신라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었다. 왕은 수많은 처첩을 거느려 수많은 자식을 낳아야 하지만, 여성은 반드시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유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천인공노할 지소태후였다. 

하지만 그것은 유교식 패러다임일 뿐, 신라의 패러다임에서는 오히려 남자만 수많은 첩과 자식을 두는 것이 천인공노할 일이었다. 게다가 신라에는 아예 전문적으로 왕실에 색을 바치는 ‘색공지신’(色供之臣) 가문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색공지신 가문은 왕후와 풍월주를 배출할 정도의 정치적 위세를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색공지신 가문으로는 드라마 〈선덕여왕〉으로 유명해진 ‘미실’의 집안이 있었다. 미실의 외증조부 위화랑은 신라에서 으뜸가는 색공지신이었다. 그는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에게 색공을 바쳤다. 심지어는 그의 아들 이화랑도 지소태후의 색공지신이 되어 만호태후를 낳기도 했다. 위화랑은 아들 이화랑과 함께 지소태후에게 색공을 바치는 것으로 충성을 다했다. 

위화랑의 충성심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위화랑의 딸인 옥진궁주가 법흥왕의 총애를 입어 아들을 낳자 법흥왕은 옥진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그러자 위화랑은 법흥왕에게 자신의 딸 옥진은 골품이 낮다며 지소부인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간언하기도 했다. 외손자가 왕위에 오를 수도 있음에도 색공을 바친 지소태후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한 것이다. 위화랑은 결국 지소태후에 의해 1대 풍월주가 되었고 그의 가문은 신라 최고의 색공지신 가문으로 인정받았다. 『화랑세기』에서도 위화랑을 “색으로써 충성을 다했다”고 칭송하였다. 

위화랑의 딸 옥진 역시 자신은 색공지신 가문임을 늘 잊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이 있음에도 길몽을 꾼 날에는 법흥왕에게 색공을 하여 큰 인물을 낳아 보고자 노력했다. 또한 외손녀인 미실을 진흥왕비가 되게 하고자 어릴 때부터 공들여 길렀다. 하지만 미실이 지소태후와 이사부 장군의 아들인 세종의 첩이 되자 안타까운 마음에 한탄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미실은 “첩의 도는 색공에 있는데 어찌 진흥왕인들 받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이에 옥진은 “이 아이가 도를 말한다”라며 매우 기뻐했다. 미실은 결국 ‘진흥왕―동륜태자(진흥왕의 장남), 진지왕(진흥왕의 차남)―진평왕(동륜태자의 아들)’ 삼대에 걸쳐 색을 바치는 왕실의 색공지신이 되었다.

 여성의 성에 수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참 막장 이야기 같지만, 신라의 문화는 신라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해야 한다.

미실의 정식 남편은 지소태후의 아들 세종이다. 하지만 미실은 진흥왕, 동륜태자, 진지왕, 진평왕, 설원공, 사다함 등에게 색공을 했다. 그럼에도 세종은 평생 미실 하나만 바라보며 정절을 지켰다. 신라인들이 모두 미실 같지 않았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사랑하는 이를 위해 정절을 지킨 신라인들의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정절을 지키는 것과 색공을 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었고 신라는 각자의 선택과 의지를 존중했다. 그래서 그들은 더럽다거나 난잡하다 표현하지 않고 ‘색공’이라 표현했다. 우수한 혈통에 성 전문기술까지 보유하여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중요한 인재를 생산한다는 나름의 정당성과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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